릴레이 시나리오

▲ ⓒ손민경

 

 

 

“나영아 휴대폰 가져간다! 나 오늘 레슨 받으러 가야 돼서 보충 안 해. 간다. 수고해. 수능 화이팅!"

한참 펜을 잡고 있는 나영이를 뒤로 하고 학교 밖을 빠져나왔다. 교복을 입고 거리를 스쳐가는 나를 보면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고3인지 모를 것이다. 그래. 일반적인 고3이라면 나영이처럼 밤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펜대를 잡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고3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예체능 입시생이다. …나를 부러워 한다. 나는 그 말이 너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내가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아시자 공부 대신 다른 것을 시키셨다. 재미로 시작해보자 한 피아노가 어느새 내가 먹고 살아야 할 수단이 되어버렸다. 예체능 특성 상 일반 입시생들보다는 성적에 부담이 덜 갔고 상대적으로 실기의 비중이 높아 고등학교에 가서도 야간자율학습 대신, 보충 수업이 끝나고 바로 학교를 빠져나와 레슨을 받으러 갔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항상. ‘세경아 집 가? 아 부럽다.’, ‘야 너 또 야자 안 해? 아 부러워.’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몰라서 하는 얘기야. 일반적인 입시생들의 하루가 1교시를 듣는 것이라면, 나의 첫 하루는 방과 후 레슨 시간이었다.

오늘도 학원에 도착하면 귀를 울리는 피아노 소리만 들려온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내 지정 레슨실 안에 들어가 악보를 꺼내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내 레슨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레슨 선생님이 계신다.

“세경아, 입시곡 연습한 거 다시 연주해봐.”

이번이 벌써 몇 번째, 아니 몇 백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가 피아노를 배웠던 마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피아노 치는 기계가 되어버린 내게서 기계적인 움직임의 곡이 흐르면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gioioso(즐겁게 연주)로 치라고 악보에 나와있잖아. 곡 분위기에 맞게 춰야지, 네가 우중충하게 치면 어떡하니? 그리고 여기 8마디 넘어가서 Doppio(2배 빠르기로)로 연주해야 되는데 아직도 손이 느리네. 너 지금 입시 며칠 남았다고 이래? 내가 말했지. 너 이따위로 치면 대학 못 붙는다고. 네 손가락 한 번은 부상 당하겠다 싶을 정도로 연습하라고 누누히 말했잖아. 어떻게 제자리니? 연습 더 하고 검사 맡아.”

선생님이 피아노 빼면 거의 남은 공간이 없는 방을 빠져 나가시자 마자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입시곡이 나오고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1천 번은 넘게 쳤다. 어제는 손가락이 퉁퉁 부어 펜도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손이 너무 아파 펜을 못 잡겠다며 친구들에게 하소연하자 다른 친구들은 수험생 특유의 예민함이 섞인 말투로. ‘그래도 너는 일찍 가서 피아노만 치지, 우리는 하루종일 펜 잡고 있거든? 야 나도 손 아프다.’.

위로를 해달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공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시기가 시기였을까. 예체능 입시생이라는 이름을 단 나는 그저 친구들과 다른 편한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잠깐 생각에 빠질 겨름도 없이 다시 나는 똑같은 곡의 똑같은 음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아. 여기서는 더 빠르게. 어느덧 음악이 아닌 공식이 되어버린 악보를 그렇게 또 두 시간씩 두드렸을까, 다시 레슨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선생님은 아까와 같은 폭언을 매번 뱉으시며 또 방을 나가셨다. 다시금 한숨을 푹 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아노가 거의 차지한 이 좁은 방에 10년 넘게 나를 가둬 놓았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힘들어도 예체능 입시생의 한탄은 다들 ‘쟤는 편하게 보내면서 왜 저래?’ 라며 오히려 나를 끈기없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 때문에 항상 나 혼자 속앓이만 할 뿐. 결국 나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이유로 똑같이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너희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힘들고 억울해. 이런 생각을 하기도 무섭게 옆 방에서 또 다른 입시생이 미친듯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교실에서 다른 친구 펜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에 반응하는 애처럼 나도 어느새 다시 멍든 손가락으로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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