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시나리오

@ 손민경

쌀쌀한 공기가 코로 들어가는 그 즈음, 칠판에는 글씨만으로도 조여오는 D-34가 우리를 놀리듯이 날림체로 써져있다. 우리의 책상에는 쌓여만 가는 두터운 문제집 색깔별로 있는 펜들이 굴러갈 듯 말 듯 놓여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칠판에 크게 자습이라는 글씨를 써놓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공부를 하는 우리를 보고 있다. 전에는 자습의 ‘자’가 스스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잊고 친구랑 소곤소곤 이야기도 하며 나에겐 그저 자유로운 시간이었는데 고등학교 3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니 이제는 스스로라는 뜻이 나에겐 한없이 크게 다가왔다. 내 옆에 쌓여가는 나의 흔적이 닿은 문제집들. 언제 이 안에 있는 같은 유형 다른 문제들을 풀었나 싶지만 자습시간마다 틀린 문제를 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2017. 11.16 8자리 숫자로 나의 모든 것이 결정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손가락에 힘을 주고 샤프와 빨간색연필을 번갈아가며 들고 있다. 그렇게 한창 머리를 박고 있으면 어느새 종이치고 예체능, 즉 음악 미술을 한다는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 나영아 휴대폰 가져간다! 나 오늘 레슨 받으러 가야 돼서 보충 안해. 간다. 수고해. 수능 화이팅!" "나영아 오늘 실기 연습 때문에 빨리 가야되서 나 먼저 간다. 8교시 잘해 !”

레슨, 실기연습 하러간다는 친구를 보면 마냥 부럽다. 내가 펜을 잡고 교실에 갇혀있을 때 저 친구는 해가 떠있는 따뜻한 하늘의 공기를 맡을 수 있겠지 싶다. 나의 따뜻한 공기는 교실에서 나는 퀘퀘한 공기인데 그들이 부럽다. 항상 어두컴컴한 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나처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그들이지만 들썩들썩 거리는 어깨를 보면 내 책상에 있는 때가 탄 이어폰과 비가 오는 문제집, 알아듣지 못하겠는 답지들을 모아 저기 뒤에 있는 파란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무겁게 오른손을 올려 그들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며 뒤를 돌아 쎅쎅거리는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그 무거운 곳에 다시 발을 들였다. 크게 숨을 쉬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의자를 꺼낼 때 끌리는 소리가 나를 놀리듯 들렸지만 어쩔 수 있는가 나의 자리는 이 자리인 것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색깔이 다른 펜들을 몇십번이나 돌려쓰면 어느새 내가 낮에 본 해는 어디 갔나 싶고 까만 하늘이 보인다. 내가 들어야할 마지막 종이 울리면 교실에서 우리에 가둬둔 동물들이 도망이라도 가듯이 같은 옷을 입고 알 것 같은 무언가에 찌든 표정을 하며 우르르 나간다. 친구들과 그렇게 인사를 한체 만체 나가 버스에 몸을 싣고 흔드는 몸을 겨우 부여잡고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간다. 이어폰에 나오는 음악에 빠질 때 쯤 익숙한 건물들이 보이고 세워주세요. 하는 STOP버튼을 누르고 집에 도착한다. 딸내미 왔다고 반겨주는 엄마의 얼굴과 무뚝뚝한 표정을 하며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 아빠에게 힘없이 나의 광대를 움직여 미소를 띄우고 방으로 들어오면 가라앉은 공기가 나를 맞이한다. 학교에서 열두시간 넘게 있으니 집에 있는 나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아니 20171116 8자의 숫자를 위해 2시간 남은 하루를 붙잡아 책을 핀다. 책을 펴 이제는 왜 틀렸을까가 아닌 왜 이런 문제가 탄생한건가 하는 문제를 잡고 다시 풀어본다. 문제를 보고 답지를 보고 그렇게 그 좁은 책상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돌리면 어느새 눈꺼풀이 슬슬 감기고 얼굴이 툭하고 떨어지고 동아줄처럼 붙잡은 펜도 손에서 툭 떨어지고 만다. 6월달까지만 해도 난 수험생이야 하는 마음에 떨어지는 얼굴과 펜을 다시 붙잡았는데 이제는 그럴 힘도 없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렇게 몸을 눕히면 온 몸에서 뭔지 모를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잠깐 눈을 붙였다 생각했는데 알람이 울린다. 이렇게 또 전혀 새롭지 않은 하루가 찾아왔다. 까매진 교복 카라를 접으며 오늘 과연 얼마나 많은 문제를 틀릴지 기대하며 학교를 간다. 오늘도 똑같이 숨소리와 책 넘기는 소리 문제집 푸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은 그곳으로 나는 발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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