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을 말하지만, 마음은 아직 불평등하다.

출처: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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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직무급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운다. 공정한 임금체계를 통해 노동시장의 불합리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바람직한 개혁으로 보인다. 하지만 직무급제가 실제로 한국 사회의 ‘공정’을 구현할 수 있을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의문이 남는다.

직무급제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의 대안으로 제시돼 왔다. 근속연수나 나이보다 ‘일의 가치’에 따라 보상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조직문화와 노동시장 구조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모두 오랜 기간 ‘연공서열’과 ‘호봉제’를 중심으로 한 인사체계를 유지해왔다. 기업 내부에서의 신뢰, 장기 고용, 암묵적 교육훈련 등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대가 이어지며 이러한 전제가 무너졌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직무급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직무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조직문화와 내부 승진 중심의 인사 시스템 때문에 실패했다. 직무를 세분화하면 할수록 오히려 부서 간 경계가 강화되고, 협업이 약화되었다. 한국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과급제와 연봉제가 확산됐지만, 기업 내부의 투명한 평가 시스템이 부재한 탓에 “성과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했다”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직무급제의 또 다른 난관은 ‘직무 평가의 객관성’이다. 정부는 공정한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직무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에서 민원응대 업무를 하는 계약직과 내부 행정직의 직무 가치는 어떤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서비스 감정노동의 강도는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결국, ‘동일가치노동’의 정의를 누가, 어떤 시각에서 내리느냐가 제도의 공정성을 결정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직무급제가 효율성 향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효율적 인사관리’와 ‘노동생산성 향상’을 강조하지만, 생산성 저하의 원인을 임금체계에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기업의 생산성은 경영투자, 기술혁신, 노동자 숙련도, 조직 내 의사소통 구조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불안정한 고용과 과도한 경쟁, 장시간 노동이 오히려 생산성을 갉아먹는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출처: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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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완전한 정보와 자유로운 계약을 전제로 노동시장을 설명한다. 그 속에서 임금은 ‘노동의 한계생산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시장은 제도적이고 불완전하다. 정보의 비대칭, 성별과 연령에 따른 차별, 비정규직 구조, 지역 간 불균형이 시장 안에서만 해결될 수 없는 이유다. 제도주의 경제학이 강조하듯, 노동은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신고전학파의 전제를 바탕으로 정책을 설계한다. 직무급제는 시장 논리를 행정적으로 이식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 노동 현장은 훨씬 복잡하다. 공공부문에서 직무급제가 도입되면, 직무 간 위계가 뚜렷해지고, 기존 호봉제가 보장하던 안정성과 공동체성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오히려 내부 격차를 확대하고, ‘공정’이란 이름 아래 새로운 불평등을 낳을 수 있다.

노동의 가치는 오직 효율로만 평가될 수 없다. 직무급제가 진정한 개혁이 되기 위해서는 직무 평가의 기술적 문제를 넘어, 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제도가 그 신념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선언일뿐이다.

공정은 숫자로 계산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직무급제의 목적이 효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설계될 때, 비로소 그것은 진정한 제도 개혁이 될 것이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것은 속도의 개혁이 아니라 방향의 성찰이다. ‘공정’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위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직무급제 논의는 다시 원점에서 질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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