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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잔을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여름에 집 나간 정신을 되찾기엔 시원한 맥주만 한 것이 없다. 날씨가 기분을 좌우한다는 으레 하는 말에 뭐 그렇게 쉽게 기분이 휘둘리나 생각해왔던 난데, 오늘에서야 그 말이 얼마나 진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날씨 한 번에 그렇게 휘둘리는 나를 보며, "어쩌면 사람은 정말 환경에 너무 영향을 받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니 예고 없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시간 맞춰 준비하시는 법이 없다. 내가 현관문을 들어서자 할머니는 바로 할아버지의 만행을 나에게 고자질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인데도 오늘따라 나도 짜증이 솟구쳤지만, 속으로 참을 인을 세 번 외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선풍기 앞에서 땀을 식혔다. 아침부터 이미 하루의 인내를 모두 써버린 느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도착했다. 여름에 치매 환자를 모시고 다니는 건 다른 계절보다 유독 더 힘든 일이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할아버지의 상태가 더 악화되지도, 그렇다고 호전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악화되지 않아서 다행이지"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병원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국밥이 먹고 싶다 하셔서 근처 돼지국밥집에 들렀다. 펄펄 끓는 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지만, 그 뜨거운 국밥을 드시고 나니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셨다. 내가 더워서 힘든 것보다, 더워하는 할아버지를 보기가 더 힘들었다.

집에 모셔다드리니,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땀에 젖어 물을 달라고 하시자 짜증을 내며 물을 가져다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저러시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난 아무 말 없이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후 씻고 맥주 한 캔을 뜯으며 일기를 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비로소 평정심이 찾아온다. 평정심이 생기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니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게 된다.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싫어서 짜증이 난 것이 아니다. 할머니의 짜증 섞인 하소연이 싫어서 집으로 빨리 돌아온 것도 아니다. 내가 알던 할아버지가 점점 약해지는 모습, 어릴 적 나의 짜증을 언제나 품어주던 할머니가 이제는 짜증을 내는 모습이 마음 한편을 무겁게 했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감정은 점점 자신을 비워내고 있다. 뜨겁게 남아 있던 감정들이 시들해지고, 나는 그저 불씨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감정은 참 이기적이다. 내가 가진 감정과 행동이 후회로 남지 않도록 해야겠다.

아, 한잔 마시고 취한 건가. 얼른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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