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시대. 누가 나에게 작금에 관해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규모가 매우 크고 광범위한 만큼, 현재의 우리에게 콘텐츠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적 요소가 되었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읽고, 점심을 먹으며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고, 재밌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에 기꺼이 영화를 보러 저녁에 극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콘텐츠의 ‘시대’인 만큼 더는 TV 드라마와 영화, 공영방송의 9시 뉴스와 같은 콘텐츠만이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아니다.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SNS가 발달하면서 그 형태가 글이든 영상이든 내가 생각하는 바를, 혹은 내가 세상에 보이고자 하는 콘텐츠가 있다면 자유롭게 업로드가 가능하다. 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1인 미디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생산자와 이용자의 경계가 분명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누구든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바로 콘텐츠가 이제 더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OTT 서비스 시장은 급부상했다. 방송국에서 만드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같은 콘텐츠를 시청하기 위해 이른바 ‘본방사수’를 해야 했던 때나, 상영 중인 영화를 보려면 꼭 극장에 가야 했던 때도 이제는 한 철 간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과 OTT 서비스에서 동시에 개봉하기도 하고, 한국의 토종 OTT 서비스인 ‘왓챠(WATCHA)’나 전 세계적으로 2억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OTT 서비스 ‘넷플릭스(Netflix)’는 기존에 방송 영상을 제공하던 역할을 넘어 이제는 자본을 바탕으로 직접 콘텐츠 제작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 성과는 여느 방송국과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콘텐츠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생산자와 이용자의 경계 없이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고, 이용자의 선택과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흐름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간에 반드시 좋은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듯이 이런 변화의 흐름 또한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고 현장 등에 나타나 차량을 끌고 가는 차량을 ‘레커차(Wrecker)’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견인차(牽引車)’라고도 하는데, 아마 일상에서 흔히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레커차에서 유래한 신종 단어가 바로 ‘사이버 렉카’이다. 사고 현장에 누구보다 빠르게 등장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까지 붙여질 만큼 이것이 사회적으로 이슈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사실 확인과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조회 수와 직결되는 수입을 더 중시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허위적 사실을 유포하는 것은 물론, 자극적인 제목과 섬네일로 많은 시청자를 현혹한다. 연예인과 관련된 허위 사실이나,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범죄 사건 등에는 늘 사이버 렉카가 따라붙는다.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의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 또한 영상을 자발적으로 시청한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다른 콘텐츠는 어떨까? <오징어 게임>이나 <수리남> 등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는 넷플릭스의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대다수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라는 것, 그리고 매우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스토리와 연출이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전통 놀이를 ‘데스 게임’으로 변모시켜 생존자를 가리는 내용이다. 전반적으로 내용이 매우 폭력적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까지 이 드라마의 내용을 SNS로 접할 수 있었다. 최근 화제가 된 <수리남> 또한 마약 조직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흥행한 이 드라마의 실제 배경이 된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은 극 중 등장하는 국가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 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그대로 국가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잡음들이 존재하는 와중에 제대로 된 콘텐츠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의 말을 빌려 볼 수 있다. ‘무시비지심 비인야(無是非之心 非人也)’. 이 말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즉 시비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문장만으로도 맹자가 시비지심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콘텐츠를 생산하는 자와 이용하는 자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바로 ‘시비지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옳고 그름의 의미는 넓게 본다면 미디어 리터러시, 좀 더 범위를 좁혀본다면 미디어 콘텐츠 생산자의 책임감과 이용자의 비판적 시각의 확대라고 할 수 있겠다. 옳고 그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콘텐츠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가지로써 시비지심을 생각한다면 위와 같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있듯이 무엇이든 한쪽의 잘못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내가 생산자의 입장이라면 콘텐츠를 만들기 전 이것이 가질 영향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용자의 입장이라면 무조건적 수용보다는 약간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 콘텐츠의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만의 ‘시비지심’이 필요한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