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을 먹다 굶어 죽은 당나귀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주변에 있던 여치의 울음소리가 너무 곱고 아름다웠던 나머지 당나귀가 여치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길래 그렇게 고운 소리로 울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여치는 자신들이 평소에 주로 먹는 것이 이슬이기 때문에 당나귀에게 그대로 ‘이슬’을 먹으며 산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당나귀는 자신도 이슬만 먹으면 여치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원래 먹던 먹이인 풀 대신에 여치처럼 이슬만 핥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당나귀가 먹던 먹이가 아니었기에 여치 같은 목소리를 얻기 위해 배고픔을 견디고 이슬만 먹던 당나귀는 결국 제대로 된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고 만다.
이 이야기는 당나귀가 자신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치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는 이상만을 좇다가 결국 굶어 죽음으로써 남이 가진 장점, 좋은 것만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선 당나귀가 가진 인식, 그리고 태도의 측면에 주목할 수도 있다. 해당 이야기에서 당나귀는 여치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싶어서 그들의 주식인 이슬을 먹으며 노력한다. 앞서 말한 관점으로 접근해 본다면 당나귀는 여치보다 몸집이 큰 동물이며, 다리도 훨씬 튼튼하고, 이슬 대신 풀을 먹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나귀는 자신에 비하면 훨씬 미물인 여치가 가진 장점을 동경하고, 여치처럼 되고 싶어서 이슬을 먹는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한마디로 어떠한 편견 없이, 상대가 가진 것을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현대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어쩌면 필요한 관점일지도 모른다. 당나귀의 약간은 순진하고 편견 없이 대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당나귀가 굶어 죽게 된 것이 아닐까? 만약 당나귀의 성격이 원작과 같지 않고, 약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거나 약은 성격이었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당나귀는 이슬만 먹다가 굶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치가 가진 고운 울음소리를 미물이 가진 하찮은 요소라고 생각했다면 여치를 따라 이슬을 먹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굶어 죽을 일도 없어진다.
또 다른 관점은 당나귀가 가진 성격과 특성에 기인할 수 있다. 당나귀는 여치를 따라 풀 대신 이슬만 먹으며 계속 버틴다. 배가 고파도 절대 풀을 먹지 않고 계속해서 이슬만 먹었다. 이런 당나귀의 성격은 좋게 보면 끈기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미련하게 보인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끈기 대신 포기를 선택한 후 풀을 먹었다면 당나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 속 당나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슬만 먹은 결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끈기’를 가진 사람은 흔히 현대 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로 소비되지만, 이 우화를 생각하면 과연 끈기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만 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당나귀가 끈기 있게 끝까지 이슬을 먹은 것이 옳았을까, 혹은 끈기보다 포기를 택해 목숨을 부지했어야 했을까? 당나귀가 가진 끈기 있는 성격을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는 인간 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상황에 따라 미련하다는 얘기를 듣거나 나를 해치면서까지 끈기 있게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드는 것, 끈기라는 미덕은 충족하지 못해도 적정선에서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우화를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면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