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감독님께
부산에서 처음으로 감독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벌써 한 달이 넘어가네요. 11월을 맞이했다는 것보다 이 기억 위에 씌워진 시간이 한 달이라는 게 더욱 믿기질 않습니다. 영화를 보며 참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습니다. 서툴러서 더 아름다운 학창시절을 묘사했기 때문일까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인 죽음을 다뤘기 때문일까요?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J감독님께서는 개인적인 일로 인해 죽음이 삶 속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라 하셨지요. 제게는 2022년이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죽음은 곁에 가까이 있었으며, 살아갈수록 점차 죽음과 가까워지리라는 것을 직시하게 된 사건이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관한 발제를 준비하던 때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입니다. 이는 죽음이란 삶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기에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의미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제게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과 예상했던 죽음 중 어떤 것이 더 큰 슬픔일까 하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죽음을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된 올해는 달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죽음도, 알고 있지만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죽음도 힘겹기는 매한가지였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J감독님께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죽음은 존재양식의 변화’라고 느끼게 되기까지 어떤 생각들을 거치신 걸까요? 저 또한 감독님처럼 죽음 앞에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작품을 곱씹어보니 해주신 말씀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따듯한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해소되고 긍정적인 결실을 보는 전개였음에도 관객들이 울음을 삼켜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단순히 감동하여서 혹은 극 중 인물이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울로 비치는 세미의 모습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걱정되기도 했지만, 거울 속의 어떤 공간에서 살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혹은 이미 세미가 죽은 사람이고 거울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이라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즉, 감독님께서 생각하신 ‘죽음이 존재양식의 변화’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세미의 죽음이 관객들의 킁킁대는 소리를 감추지 못할 만큼 슬프게 다가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미의 죽음은 너무나 평범한 날 중 하나였지만, 그 과정이 평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학여행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한 세미와 텅 빈 버스에서 홀로 교복을 입은 채 눈물을 흘리는 하은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왜 이들은 함께 했던 약속을 같이 지킬 수 없었으며, 평범했던 이들의 일상은 지켜지지 못했던가 하는 설움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이태원 참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어떤 죽음이 더 가볍고, 무겁다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희생자들에게 “왜 그곳에 갔느냐”고 질책했습니다. 친구들과 놀고 귀가해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 세미와 친구들이 가졌던 꿈들, 세미가 수학여행을 다녀와 하은이와 하려던 일들, 수학여행을 준비하며 기대하던 학생들처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도 ‘일상’을 보내던 중이었음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요?
J감독님 영화를 보며 흘렸던 우리의 눈물은 아름다운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마음이나,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토록 평범했던 하루를 살던 사람들이 평범하지 못한 죽음을 맞게 되어야 했던 원인에 대한,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사건으로 인한 고통이 얼룩진 눈물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간다는 말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삶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인 동시에 ‘평범하게 죽을 권리’를 지켜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감히 뭐라 말을 얹을 수도 없는 아픔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함께 이고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J감독님께서도 그러하시겠지요.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때까지 평범히 죽을 권리를 지켜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