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

이번 기회를 통하여 나는 영화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를 통하여,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하여 19세기 당시에 바라보는 주체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가 아닌 한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보게끔 관객의 시선에서의 장면의 전환을 보여주는가 하면 한 무대 안에서의 장면 전환, 그리고 무대 뒤편을 보여 주는 듯한 영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기법과 영화 한 신마다의 감정에 대한 힌트가 영화에 시선이 가게끔 만들어 주었다. 또한 사람을 바라본다, 관찰한다.와 같이 ‘보다’의 의미를 see와 look라는 단어로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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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의 불륜을 꾸짖는 안나가 장교 브론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 초입부터 충격이었다. 국가의 아들이라 불리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나 아내에게 그 시절의 부인상을 강조하는 안나를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남편이지만, 그런 남편과의 사이에 자라는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흘러넘칠 만큼 존재한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모성애가 넘친들 뜨거운 불에 뛰어 드는 나방처럼 안나는 불타는 사랑, 브론스키를 택한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카레닌에게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알리는 당당함에 사랑을 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던 시대라 하더라도 더이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설득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결국 브론스키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만 19세기 러시아는 외도에 대해 너그럽지 않다. 그녀가 받는 차가운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에게는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된다. 아마 영화 중간에 묘사되는 어둠속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모습이 그녀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아내가 항상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까레닌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일 분 단위로 구분되는 답답한 생활이 아닌 자유라는 새로운 쾌락을 맛 본 아내가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다.  믿었던 아내가 아들마저 등지고서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가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너는 내 아내야’라고 그녀를 설득하며 협박한 것이 자신의 권위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지만, 가정적인 남편보다 일만 하게 만드는 시대적인 상황이 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안나와 다르게 해석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까레닌을 이해한다면 19세기 러시아 속 가정보다 일에 열정적인 남성상을 잘 표현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 네이버 영화

 브론스키는 안나가 상류사회 속 귀부인임을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보고싶다는 욕구로 그녀에게 다가섰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떠나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며 그녀의 일탈을 도운 그가 로맨틱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 그녀가 아름다웠기에 그녀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어 하였지만, 어느 샌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see)에 사랑했던 그녀는 함께 생활하게 된 후 소설 역시 '살인자가 자신이 죽은 시체를 바라보는 심정'이라고 표현하는 등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은 것인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하는 눈빛(look)이 바라보는 눈빛(see)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표현을 하여 알아 볼 수 있었다. 안나 역시, 곤경에 처한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는 모습을 see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볼수록 그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커지며 그를 관찰하고 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속박하려 한다. 이러한 그녀의 집착에 과연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싶지만, 브론스키는 그녀를 끝까지 품에 안는다. 이러한 안나와 브론스키의 모습을 보며 <마담 보바리>와 <안나 까레니나>의 인물을 비교해 보았다.

 사치에 빠진 엠마에 마음이 식은 남성들은 모두 엠마를 떠나가버리고 그녀는 산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되지만, 안나 곁에 남아 있는 브론스키의 모습이 사랑이 아닌 동정이였고, 명예의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남아 있는 모습이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기는 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안나 역시 죽음를 맞게 되지만 안나는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엠마와 안나 둘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지만, 만약 그녀들이 사치와 불륜, 육체적 사랑에 중독되지 않고 ‘남편과의 소통적 사랑’, ‘정신적 사랑’을 누군가가 가르쳐 줬다면 이들의 여생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며 이들과 대조되는 정신적 사랑을 한 키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안나와 키티는 사랑의 시선에 대한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안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눈빛을 가지고 그를 맹렬히 쫓아 속박을 하고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반면에 키티는 사랑하는 사람과 정신적으로 소통 하려한다. 누가 올바른 사랑을 하는가 질문을 한다면 정답은 없다. 안나와 키티는 사랑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를 뿐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사랑하는 이의 진정 어린 눈을 읽고, 기뻐하기에 겁을 먹는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하는 키티를 올바른 사랑이라 생각하며,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다 차갑게 식어버리는 육체적인 사랑보다 오랫동안 서로를 의식하는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부인이 외도로 남편을 버렸다는 내용은 큰 이슈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니, 외도라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질렀을지라도 그녀가 젊은 장교와 외도를 하게 선택, 혼외자식을 낳는 선택, 새가정을 꾸려 타인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사교생활을 하는 선택 등 자신의 선택이 주는 달콤한 쾌락에 즐거워하며, 쓴 고통에 괴로워 하는 그녀에게 잠시나마 감정 이입을 해보았을 것이다. 단지 19세기 러시아의 고위층의 불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는 한 여자를 보며 고통을 공유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서는 죽음을 선택해버린 그녀를 보며 깨닫게 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단지 타인의 시선을 덜 의식했더라면 그녀는 죽음까지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은 존재하지만,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은 없었던 것일까 등 궁금한 점이 많다. ‘나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보여지는 나’ 만을 꾸미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는 거울 속 실제의 나를 가꾸지 않고 거울에 비치는 나를 꾸미는 듯 헛생활 하는 것이라고 보였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 1도의 차이에도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 지기 때문이다. 19세기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람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을 더 중시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런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떳떳한 일을 하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든 타인의 시선에서의 나만 생각한다면 나는 아무런 생활도 못할 것이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더 중시하여야 한다.

 기차에 몸을 던져 버린 그녀의 허무한 죽음의 엔딩신이 오히려 타락된 인간의 죽음을 비롯하여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한다. 그녀가 자살을 택함으로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는 불륜을 떠나 인생을 사는 데에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신의 선택이 따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선택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타인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이나 과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을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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