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산 속에서 주인공이 외친다.

 

▲ Ⓒ 다음영화 <러브레터>

 

“お元氣ですか? (잘 지내시나요?)”

 

 일본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는 일본의 유명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으로 연기한 영화다. 이와이 슌지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 롱쇼트로 찍은 장면도 자주 보인다. 사실 지루한 감이 살짝 느껴질 때도 있다. 광활한 배경을 보자니 언제쯤 본격적으로 시작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도 있다. 처음부터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배경을 천천히 설명하는 듯 느낌을 받는다. 또한, 색채를 활용해 인물이 처한 환경이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는 이와이 슌지 영화의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가 만든 영화는 한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러브레터> 뿐만 아니라 <릴리슈슈의 모든 것>,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립반윙클의 신부> 까지. 그의 감성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항상 기대하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번 글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3편을 감히, 영광스럽게 선정해보고자 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 다음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나에게는 릴리만이 리얼. 나에게는 에테르만이 살아있는 증거. 하지만 그 에테르가 없어지고 있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블랙 슌지의 영화라는 걸 직접 보고 느끼게 된 영화였다. 타닥타닥 하는 키보드 소리가 귀에 맴돌고 가슴에 박히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릴리 슈슈의 프로필을 입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의 주 내용은 당시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던 중·고등학교 내 학교 폭력과 따돌림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조금은 자극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게 그려진 장면도 종종 보인다. 괴롭힘을 받는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와 유이치를 심하게 괴롭히는 호시노(오시나리 슈고) 둘의 공통점은 바로 릴리 슈슈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색채는 자연에 있는 색을 그대로 담지만, 왠지 모를 차가움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둡다’, ‘비극적이다.’라는 것을 대놓고 관객에게 느끼게끔 보여주는 것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내용과 더불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감독의 세밀한 기술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또한 롱쇼트와 짧은 쇼트를 사용하여 유이치의 불안한 심정과 호시노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 Ⓒ 다음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개인적으로 명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데 츠다(아오이 유우)가 학교에 가지 않고 연을 날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기도 연을 날리고 싶다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연을 띄우는 장면이 있다. 그 후 츠다는 자신도 하늘을 날고 싶다며 자살한다. 영화의 내용을 다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츠다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고 죽어서야 자유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프게 다가온다.

 

<4월 이야기>

▲ Ⓒ 다음영화 <4월 이야기>

“어차피 기적이라고 부를 거라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4월 이야기>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 러닝 시간이 가장 짧다. 내용도 단순하다. 고등학교 때 좋아한 남자 선배를 따라 대학에 진학한 우즈키(마츠 다카코)가 도쿄에서 적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영화 후반쯤에 자주 가던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선배도 만난다. 그렇다 할 큰 갈등이나 사건이 없어도 영화는 잘 진행된다. 액션을 좋아하고 ‘막장’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첫사랑’을 소재로 만든 영화들을 보면 풋풋함과 설렘, 애틋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그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제 3자의 캐릭터를 억지로 등장시키거나 과장스러운 감정 연기 혹은 의도된 연출이 눈에 띌 때가 있다. 그러면 오히려 내용적인 면에서도 매끄럽게 흐르지 못하고 그 영화를 바라보는 감정을 느끼기 위한 흐름마저 끊기게 되어 거부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4월 이야기는 그런 설정이 없어서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더 돋보였다. 우즈키가 자신과는 맞지 않은 낚시 동아리에 들어가 낚싯대를 잡는 방법을 배우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1학년의 순수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립반윙클의 신부>

▲ Ⓒ 다음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줘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도…”

 <립반윙클의 신부>는 현실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플래닛이라는 SNS를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나나미(쿠로키 하루)를 보여준다. 나나미의 남편도 플래닛을 통해 만났다. 그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도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 다음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그에 따라 SNS 역시 활발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현실에서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하고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SNS 상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나미 역시 이런 SNS 세상에서 자신의 소심한, 어떻게 보면 답답한 성격을 위로받고 고민 상담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 Ⓒ 다음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이런 나나미에게 덫을 친 인물이 내가 좋아하는 아야노 고가 연기한 아무로라는 인물이다. 아무로(아야노 고)는 SNS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나나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 <립반윙클의 신부> 캡처

중간에 나나미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짐을 챙겨 집을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무거운 짐을 이끌고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는데 그 장면에서도 롱쇼트를 사용하여 나나미의 혼란스러움과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저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마침 그 상황에서 울먹이는 나나미와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배경음으로 흘러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 안타깝지만 나나미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개인적으로 명장면으로 꼽는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의 전통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자신만의 경력을 쌓았고 그 경력을 영화에 담아 기존의 영화 비주얼과는 다른 자기만의 비주얼로 영화를 만들었다. 비판도 받았지만 이른바 이와이 월드라고 하여 옹호를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배두나와 얼마 전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난 故 김주혁과 함께 단편 영화 <장옥의 편지>를 찍기도 했다. 이렇게 이와이 슌지는 자신의 스타일을 내세우며 일본 영화계의 한 획을 긋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밤, 그의 영화 한 편을 보며 잠시 이와이 월드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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