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Peacock
사진출처 = Peacock

영화라는 것이 그리 거창한 예술이 아니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전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를 원한다.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티켓값은 계속 오르는데, 내 2시간이라는 시간을 영화관에 앉아 재미없는 영화에 소비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활동은 없을 것이다. The Holdovers라는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원재를 가진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바튼 아카데미로 수입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면 남겨진 사람들은 조금 더 직설적인 표현이라면 바튼 아카데미는 조금은 포괄적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내 광기를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이 광기를 내뿜었을 때뿐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나온 대사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이 영화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연관성이 지목된다. 상실은 가진 남겨진 사람들끼리 부딪치며 서로를 위로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억에서 잊힌다는 것은 의미를 다 했다는 뜻일 것이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잊히겠지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감정들을 짓누르며 살아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본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게 이런 유형들이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겹겹이 눌러 담고 압축된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스스로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그들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상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영화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진출처 = Screen Daily
사진출처 = Screen Daily

누군가를 잃은 상실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런 걸 말하고 다니는 인간들은 전부 엉터리일 것이다. 비련에 동화 속 주인공인 양 코스프레하고 다니는 인간들 말이다. 정말로 아픔은 아는 인간이라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참고 살아간다. 오히려 숨기려 안쪽으로 몸을 움츠린다. 그렇기에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에 벽에 막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서로 전혀 섞이지 못한다. 주인공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하는 고등학생이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집으로 갈 생각에 들떠있었지만, 엄마와 새아빠의 신혼여행 때문에 학교에 고립되고 만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예민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면,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것이 익숙해진다는 말에 전형을 보여준다. 화가 난다고 해서 남을 욕해도 나의 화를 쉽게 가라앉지 않지만 그는 아직 방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학생이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서조차도 무시당하고 소외된 바넘 선생님은 만난다. 자신에 제자가 교장이 된 학교에서 재직 중인 그는 올해도 방학 중 학교 관리 일을 자처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일 말이다. 그는 너무 객관적 평가와 고지식한 성격 탓에 많은 곳에서 빈축을 사고 있다. 얼마 전 학교에 많은 기부를 한 집안에 학생을 낙제시켜서 교장과 많은 갈등이 생겼다. 그렇게 소외된 그들이 겨울 방학 동안 학교 안에 갇혀 시간을 보내는 내용에 영화이다. 정말로 줄거리는 별거 없다. 영화에 템포도 굉장히 길고 느려서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영화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낯선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일과 닮았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느낀다면 이 영화는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경험은 현실에서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진출처 = Miramax
사진출처 = Miramax

주인공은 아버지를, 바넘 선생은 사람과 관계를 잃었으며, 학교에 주방 아주머니는 아들을 잃었다. 가장 직접적인 상실을 격은 사람은 학교에 식당 아주머니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처음으로 맞이한 성탄절을 그녀는 쉽게 보낼 수 없었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그녀의 슬픔이 터져 나오고 어느 누구도 제대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없었다.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들만이 모여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한데 모여 시간을 보내고 상실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덧칠해 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성장하며 만들어 줄 수 있는 최선 방법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다 보면 납득하게 된다.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나도 아파봐서 안다는 말 정말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들어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 과정들은 너무나 섬세하게 묘사된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면 사람과의 관계도 명확해진다. “누군가 손을 내밀려 할 때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중요하다.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죄악이고 뭐고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 후반부 주인공은 바넘 선생에게 진실을 말하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바넘 선생은 그와 함께 주인공에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같이 가게 된다. 평소 같았으면 학교에서 나오지 않았을 인간이 지금은 보스턴에 있는 주방 아주머니에 집도 데려다주고, 주인공의 아버지까지 만나러 오게 되었다. 아버지와 만나게 된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를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는 그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알아봐 주고,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시답잖은 답변에 그는 돌아서 나오게 된다. 요양원을 나온 뒤 그는 바넘 선생에게 모든 것을 말해버린다. “저도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죠?”라는 두려움은 이미 그를 집어 삼키는 중이었다. 바넘 선생은 아버지와 주인공은 별개의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에게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며 얘기해 준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처음에 모두가 싫어하는 고리타분한 역사 선생이 아닌 한 명의 어른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관객이 인물에게 심적으로 강하게 이입되는 순간이다. 나를 힘들게만 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네게 힘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라는 생각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의지가 투영된 장면이었다.

 

사진출처 = Town And Country Magazine
사진출처 = Town And Country Magazine

영화를 보면서 힐링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직접 느끼고 체험하며, 많은 감각들을 일깨울 수 있는 것들로 사람들은 대부분 힐링을 한다. 하지만 기껏 해봐야 시각과 청각만을 충족시키는 영화라는 매체로 힐링을 선사해 주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좋은 영화가 너무 많다. 힐링 영화의 기준은 전부 다르다. 필자가 아는 사람에게 힐링 영화란 “쏘우”, ”할로윈” 같은 슬래셔 장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이 리치 스타일에 인간 군상극을 보며 힐링을 한다는 인간도 있었다. 물론 그들과 그리 가깝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힐링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작품들이다. 힐링 영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리틀 포레스트보다는 이 영화를 더 선호한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리틀 포레스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겠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또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깊이 감정이입하고 싶을 때, 필자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 그렇기에 더더욱 드라마 장르를 선호한다. 굿 윌 헌팅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영화를 찾는다면 이 영화가 제격이다. 정말 재밌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 번 정도는 이 이야기에 자신을 투영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사진출처 = The Boston Globe
사진출처 = The Boston Globe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사실 바넘 선생은 고집과 자존심이 꽤나 쌘 것으로 묘사된다. 옛 친구를 만났을 때, 고등학교에서 일한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였고, 논문 표절로 인해 친구를 차로 쳐버렸다는 말로 했다. 말로는 친구가 자신의 논문을 표절했다고는 말하지만, 뭐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보고 있자니 삶이 망가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존심과 고집을 내려놓 못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일어서서 다른 길을 찾고 나아갈 수 있지만,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 된 바넘 선생은 그를 보고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바넘 선생은 그에게 자네는 아직 어리다고 말한다. 맥주와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그에겐 아직 이르다며 거절한다.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바넘 선생을 채우며, 그가 안타까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인물들은 나름에 결말을 맞이한다. 바넘 선생은 성탄절을 매년 혼자 보내왔고, 주방 아주머니는 올해 처음으로 성탄절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주인공은 처음으로 학교에서 성탄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들이 한데 모여 해가 바뀌는 카운트다운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인다.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한마디에 위로 같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는 연말마다 꺼내볼 수 있는 영화가 생겼다는 것에 매우 큰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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