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현상으로부터, 불통을 소통이라고 말하는 사회를 알다.

 

텔레비전(제공=한국저작물위원회)
텔레비전(제공=한국저작물위원회)

미디어 산업의 주류 소비 변화가 조그마한 스마트폰, 도구 하나로 현대 사회에 거대한 태풍을 불게 했다. 올드미디어이자 레거시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은 이제 켜지지 않는 검은 화면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저력을 보여주고 있을까. 나의 일상에서의 영향을 보자면 확실히 많이 영향이 줄었다. 오죽하면 큰 방에 있던 60인치 TV를 폐기물로 버리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신문은 이제 고기 구워 먹을 때 쓰는 기름 방지용 종이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플랫폼 산업과 구독 경제의 활성화 때문이다. 유튜브라는 또 하나의 셀 수 없는 소비자의 안성맞춤 방송 생태계가 형성되었고, OTT 서비스를 통해 굳이 밖에 영화관을 찾지 않아도 방구석에서 타인에게 감시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일상으로 와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VR기기 발전이 미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현실(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이 온라인의 소통으로 주류 이동하면서,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핸드폰을 들고 문자로 대화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내가 직접 그러고 있다, 조별 과제 할 때도, 의견 제시할 때 대면으로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서 카톡으로 대화한다. 조사 자료를 찾는 데도 이해가 어렵다며 유튜브 영상 링크를 찾는 후배들도 심심찮게 보기도 한다. 실질적 문맹이라며 글 3줄만 넘어가면 이해가 어렵다는 동기도 있다. 그만큼 일상에서의 영상 미디어는 문자 미디어를 다 집어삼킬 만큼, 위력을 행사한다. 스마트폰의 프레임의 한계를 응용해, 쇼츠라는 서비스를 각종 플랫폼에서 시작되었고, 이는 좀 더 빠르고, 함축적인 미디어를 만들게 했다. 여기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는, 의미 전달이 단편적으로 비치기에, 영상이 밝히고자 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갈 수 있고, 사실보다 재미에 가깝게, 좀 더 자극적이고,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 이성으로서의 판단을 저하하게 한다.

특히나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건드리는 주제로 다뤄지는 영상은 조회수가, 다른 주제보다 폭발적이고, 유명 인사의 정보 전달로 소비자의 지시에 따라 하기 현상은 당연한 문화처럼 받아들인다. 나는 댓글도 하나의 미디어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영상 소비자의 평가로 다뤄지는 댓글 기능은 쌍방향 소통의 역할 차원을 넘어서서 2차 미디어 소비의 역할을 한다. 영상의 영향보다 이젠 댓글의 영향이 더욱 커졌다. 오죽 하면 영상을 끝까지 보지 않고 댓글을 먼저 본다는 말이 있고, 댓글 평가를 영상의 주제로 가는 현상도 보이기 때문이다. 주요 공중파 3사인 KBS, MBC, SBS는 오래전 해외 사람들 대상으로 한 유튜브에 이미 올려두었던 방송프로그램 영상들을 대거 국내 사람들도 볼 수 있게끔 허용했다. 신규 방송프로그램은 방영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하이라이트나, 전체 영상이 올라온다. 이는 공중파의 수익 창출력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신호인데, 방송은 광고나 구독료로 제작과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한국에서는 공영방송의 수신료 인상 문제가 이슈로 제기된 적이 있으며, 투자 저조로 인한 영상 제작 취소도 흔히 벌어진다.

올드미디어의 권위 위상은 점차 붕괴하고 있지만, 아직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저널리즘의 본디 역할은 올드미디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TV보다 유튜브처럼 플랫폼에 맞춘 저널리즘을 고수하게 되니 이 또한 부작용 유발을 겪는다. TV의 방영된 뉴스가 유튜브로 재생산되고, 시청자들의 의견 제시로, 미디어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디어의 생존 여부의 권한은 이제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주도권이 이동했다. 그리하여 공중파들은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무분별한 미디어 시장 확장과 뒤늦은 규제 도입 사이에서 검열의 한계를 어디까지 지어야 하며, 미디어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우리 사회에 깊이 있는 담론 형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미디어 산업을 괴롭힌다며 담론 형성을 입막음하고 있다.

우리가 수많이 보고 있는 유튜브 영상의 나이 등급이나, 유해 등급 판정은 거의 볼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유튜브 알고리즘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정해지는데, 이에도 문제가 있다. 알고리즘에도 편향이 분명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취사선택을 할 수 있고, 무한한 정보 개방성으로 인해, 사용자의 미디어 피로도는 배로 증가하고, 걱정거리도 배로 증가했다. 초연결사회에서 누구나 미디어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으니 마음 놓고 주장 펴기가 어려워지고,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이제 대중들 앞에 선다는 것은, 매일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낙인은 모두의 공포가 되었다. 소비자도 매일 심판 받는 꼴이 되었다. 미디어가 말하는 사회상에 부합하는지 늘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소비자 스스로가 택하고 있다. ‘모든 건 사회에서 비롯된다.’가 제대로 표현되려면 현대사회에선 ‘모든 건 미디어에서 비롯된다.’로 본질로 탐구해야 한다.

스마트폰(제공=한국저작물위원회_아사달)
스마트폰(제공=한국저작물위원회_아사달)

우리가 각종 사회의 부작용을 겪게 하는 건 미디어의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분명 교육의 효과가 존재하고, 이에 세상을 설득하고자 하는 기능을 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뉴미디어의 영향으로 소통의 부재도 오히려 강화되었다. 여기저기 정보 습득이 다양하다 보니, 이견을 보이는 경우가 일상에 많아졌다. 공통의 가치관이 부재하고, 도덕관념이 허물어지고, 넓은 시각을 쉽게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과도기에 진입했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 한 건, 미디어의 빠른 다변화이다. 국민 95%가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나는 매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다. 버스 정류장에도, 계단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인도에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드물다. 그리고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있다. 우리는 조그마한 핸드폰을 들고서 세상과 소통한다고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불과 10cm도 안 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특이한 문화는 당연한 보편화된 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타인과의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원자화로 사회가 쪼개지고 있다. 유교 문화로 인한 예의 개념으로의 정숙이 아니다. 스마트폰이 만들어 낸 침묵이다. 무섭지 않은가. 이 침묵이 하루 종일 흐른다는 것이 말이다. 일본 지하철에서는 사람 몸만 스쳐도 질겁한다고 한다. 나는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똑같은 현상을 겪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해 무감각해졌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었다. 이제는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미디어의 정보를 알아야 한다. 그 개인으로서의 정보가 아니라. 이는 나의 정보가 곧 타인의 정보이자 미디어의 정보이다. 나는 고교 시절 미디어가 2차 사회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제는 아기에게도 미디어가 있는데 1차 사회화 역할을 한다고 재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미디어는 신이 되었다. 뭐든지 알려주는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다. 우리는 이에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가 왜  보고있을까? 하는 의문을 한번 쯤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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