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 또다시 어수선해졌다. 사실 역사적으로 중동 이란 지역은 어수선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세계사를 배우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중동 지역의 사건들을 마주했다. 중동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서 이들은 기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념에 따라 싸우는 경우도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 202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간의 전쟁도 그러한 연장선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신념인 유대교를 위해 싸우고, 하마스는 이슬람교를 신념으로 하여 싸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신념에 대해 이해와 사랑이 아닌 복수와 분노의 고리를 잇고, 흐르도록 한다. 그 복수와 분노의 고리를 만든 시대의 책임은 후퇴하며, 고리는 점차 단단해져 끊을 수 없게 되고, 그 고리에 묶인 개인들은 그저 그을리고 으스러져 갈 뿐이다. 드니 빌뇌브의 작품 <그을린 사랑>은 그런 개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 IMDb
ⓒ IMDb

 어떻게 그들은 분노의 고리를 엮게 되었는가. 고리를 엮은 사회적 배경을 파악해야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왈이 아이를 끌어안고 죽은 여인을 묘사하는 버스 테러 사건은 작품에서 1978년경에 일어나지만, 실제 레바논 내전과 팔랑헤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난민 버스 테러는 1975년에 발생하였다.' '<그을린 사랑>은 내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소하 베차라(Souha Bechara)의 정치 수용소 경험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남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 앙투안 라하드(Antoine Lahad)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서, 체육 강사로 접근하여 그를 향해 두 발의 총을 발사한다. 이후 성공하지 못한 채 남부 레바논군(ALS)에 체포되어 10년 동안 지하 감옥에 투옥된다. 베차라는 프랑스 병영지로 사용되었던 키암(Khiam)이란 곳에서 6년 가까운 세월을 독방에서 보내게 된다.' '나왈은 1978년 민병대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딸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위장 잠입하여 그를 향해 두 발의 총을 쏜다. 한 발은 난민들을 위해, 또 한 발은 레바논인들을 위해서! 그녀는 암살에 성공하지만, 체포되어 '크파르 리야트' 감옥으로 이송된 채 5년간의 독방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실제 사례들을 각색해 이야기를 만든 이 영화는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다.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레바논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일어났고, 영화의 주인공인 나왈 마르완은 1949년생이다. 나왈 마르완은 20~40대를 전쟁으로 파괴된 삶을 보낸다. 나왈 마르완이 20~40대일 때는 1970~80년대로, 레바논 내전의 시기와 일치한다. 나왈은 영화 내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며, 사망했을 때 자기 신체를 엎드린 채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신체를 엎드린 채 매장하는 건 이슬람교에선 모욕적인 행위다. 기독교인이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모욕적 행위를 보여주며 레바논 내전 당시의 종교적 갈등과 상처를 드러낸다. 레바논 내전은 어째서 일어난 것인가? 이 레바논 내전 또한 이번 팔레스타인-하마스 전쟁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충돌로 발발한 것과 비슷하게,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충돌로 인해 발발했다. 레바논은 이슬람교가 대부분인 중동 지역에서도 기독교 인구가 45%가 될 정도로 그 비율이 높다. 레바논 지역이 기독교 비율이 높아진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옛 로마 제국 때 관할구역이었던 레바논 지역은 기독교의 종파인 ‘마론파’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이슬람 제국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무슬림의 비율이 높아졌다. 십자군 전쟁 시대에 레바논 지역은 다시 기독교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지만, 십자군의 시대가 저물고,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19세기가 되면서 그 오스만 제국조차 쇠퇴하면서 마론파와 무슬림 간의 충돌이 자주 일어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고,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식민지화한다. 그들은 최악의 일을 벌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가 레바논의 국경을 그을 때, 시리아의 영역 일부를 포함한 채 그었다. 이후 레바논이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하자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이 대규모로 레바논에 유입된다.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교 진영의 충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 충돌들은 분노의 고리가 되어 1975년, 마침내 레바논 내전이 터진다. 이 레바논 내전 속에서 나왈 마르완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실제 사례들을 참고하여 영화를 시청한다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행동 이유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 Wikipedia
ⓒ Wikipedia

 이 영화를 더 이해하고 싶다면, 배경을 알았으니 감독인 드니 빌뇌브를 알아야 한다. ‘<그을린 사랑>(2010)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캐나다 지역에서 쭉 살아왔던 남매가 중동 지역의 역사적 상흔과 이민자의 아픔을 더듬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에서는 멕시코 국경 지역의 마약 밀수범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미국과 멕시코를 구분짓는 범죄 카르텔의 실체를 고발한다.’ 이외에도 <컨택트> 등 드니 빌뇌브의 작품에는 ‘항상 무언가를 찾아가는 형식을 취한다.’라고 영화평론가 송경원은 말한다. 무언가를 찾아가는 형식을 취하면서, ‘관객은 자연스레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외의 정보들은 상당 부분 차단된다. 인물이 보고 느끼는 제한된 정보에 기반한 서스펜스 기법이야말로 드니 빌뇌브식 서사의 동력이다.’라고 그의 작품 특성을 설명한다. 서스펜스 기법의 서사와 더불어 드니 빌뇌브는 초월적인 폭력과 무질서라는 압도당하는 존재를 내세우고, 그 앞에 나약한 개인을 던진다. <그을린 사랑>에서는 그것이 레바논 내전에 내던져진 나왈이라는 인물로 표현된다. 그리고 압도당하는 존재로 군인, 경찰 등의 공권력을 앞세워 인물을 억압한다. 압도하는 존재에 대해 잔느와 시몽은 공통된 목적을 가지지만, 상반된 행보를 보인다. 영화 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 및 두 단체를 놓고 공통의 목적을 가지더라도 상반된 행보를 통해 대립시키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또한, 여성의 존재를 진실을 찾거나 해결의 도구로 위치시켜 주제의식을 더욱 고취한다.

 설명한 요소들을 통해 드니 빌뇌브의 작품 특성과 <그을린 사랑>의 작품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레바논 내전이라는 전쟁으로 갈등이 주는 공포, 비윤리적 사건 등 참혹함을 알렸고, 참혹한 전쟁 속에 던져진 나약한 개인에게 남겨지는 상처를 표현한다. 전쟁은 상처를 남기며 분노의 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하고, 결국 폭력과 복수의 순환을 불러오며,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분노와 슬픔의 고리 속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중동의 복잡한 종교적 갈등에 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개인과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가족사에 관해 진실과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희망의 원천을 찾아 상처받은 정신을 회복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진정한 주제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일 뿐이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어내자는 게 드니 빌뇌브가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사랑과 용서를 통해 분노의 고리를 끊어내자… <그을린 사랑>에 이 주제 의식이 어떻게 들어맞는가. 어떠한 사랑의 형태가 있는가. 그 사랑의 형태들은 어떻게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어내는가. 나왈 마르완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왈은 기독교인이었고, 상대인 ‘와합’은 무슬림이었다. 당시의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충돌이 잦을 때다. 그런 종교적인 벽을 뛰어넘어 서로를 사랑했다. 종교를 뛰어넘은 사랑의 형태는 특별하다. 특별하기에 더욱 빛난다. 종교와 신에 종속된 감정을 초월하여 인간 그 자체가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을 느낀다. 종교와 신에게서 벗어났다는 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벗어던졌다는 것. 이들의 종교를 초월한 사랑은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어낸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솔직히 지금 시대여도 믿기 힘든 형태의 사랑이다.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교랑 서로 결혼한다고 하면 모두 마음속으로 물음표를 띄울 것이다.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한 감정인 사랑을 교리에 잡아먹힌 시대정신과 분노의 고리라는 집단의 기억이 가두고 탄압한다. 만약 시대가 고리를 끊어내고 이들의 사랑을 용서했었더라면, 와합은 총을 맞지 않았을 것이고, 나왈에게는 비극적인 가족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생각해야 한다. 종교에 갇힌 폐쇄적 사랑은 과연 인간중심의 도덕적으로 옳은가를.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종교를 초월한 사랑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었다면, 용서를 통한 사랑의 형태로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는다. 나왈과 친아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순수한 감정의 사랑은 그을린다. 이 또한 분노와 슬픔의 고리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형태다. 나왈은 부적절한 사랑의 형태에 분노하거나, 또는 슬퍼한다. 그러나 분노하고, 슬퍼하기 위해 고리를 잇기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느낀다. 고리를 이어봤자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고, 또 부적절한 사랑의 형태뿐이니까. 남은 건 그저 용서뿐이다. 용서만이 이 고리를 끊어낼 방법이다. 그래서 용서한다. 용서를 통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어내고, 응어리진 마음을 떨쳐내고, 힘을 내고, 딛고 일어나 상처를 치유하길 바란다. 모든 것이 불타 그을린 사랑의 형태는 부적절하게 남아버린다. 그것 또한 순수한 감정의 사랑으로 닦아내려 노력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한다. 분노와 슬픔의 고리가 만들어낸 비극적 형태의 사랑을, 오롯이 순수한 감정의 사랑으로 감싸 용서하고 고리를 끊어낸다. 마음속 한편에 가진 순수함을 꺼내어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인간의 치유력에 감탄한다. 우리 모두 용서를 통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깨부수고 상처를 치유하자. 드니 빌뇌브도 간절히 이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 Christal Films Distribution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을린 사랑>은 오이디푸스와 배경만 다를 뿐이지, 플롯 자체는 비슷함을 보였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순응하지만, 나왈 마르완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주도하는 모습에서 신화와는 다른 결말을 얻어낸다. 이 영화는 자칫 너무 고전적이고 비현실적일 수 있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현실적인 전쟁의 참혹함을 더해 현대식으로 잘 해석해냈다. 동시에 레바논 전쟁의 역사적 배경과 드니 빌뇌브의 작품 특성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분노와 슬픔의 고리를 끊자는, 진정으로 원하는 주제 의식도 잡아냈고, 그 주제 의식에 관해 탐구도 해보았다. 하지만 주제 의식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라는 한계점이 존재한다. 고리를 끊어낸다는 건 결국 평화를 이룩하자는 건데, 세계가 힘을 합쳐 평화를 이룩하기엔 고리가 영영 풀지 못할 정도로 꼬여버렸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닥친다. 이걸 풀기 위해선 더욱 큰 힘이 필요한데, 평화를 과연 힘으로 유지해야 하는지, 그 힘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져본다. 한계점뿐만 아닌 의의까지, 영화 <그을린 사랑>은 그 무엇도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졌다. 우리 모두 생각해주길 바란다.

 

 

저작권자 © MC (엠씨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