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울의 아들'과 '인생의 아름다워'를 보고

   오로지 한 민족의 절멸이라는 끔찍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직적으로 계획하여 설계된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끔찍한 목적이 한 나라의 지도층과 군인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대다수가 방조하고 동조하여 내린 최종적인 결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믿기지 않겠지만 이 모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곳에서 이루어졌었던, 온 인류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부끄럽고 참혹한 인류의 흔적이다.

 

© Nathalie Valanchon

   아우슈비츠 수용소란, 간단히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을 수행하고자 폴란드 남부에 세워진 절멸 수용소이자 강제 수용소라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서 85%가 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사망했으며 노동 가능한 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겨우 10~20%에 불과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른 자료를 읽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노동 가능한 수용자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강제 수용소보다, 오로지 유대인 학살만을 목적으로 건설한 절멸 수용소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화된 벽,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공동샤워실로 무장한 가스실,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 시체를 처리하는 소각장들은 독일의 대량 학살과 강제 노역뿐만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 과정까지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안겨준다. 오늘날까지 전 인류가 이러한 나치의 만행에 치를 떠는 이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서 인간으로서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처참한 생체실험과 살인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소 무겁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세계의 역사 가운데, 그저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설계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다룬 영화, ‘사울의 아들인생은 아름다워두 편을 소개하며 비교하고자 한다.

 

©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그냥 수용소가 아닌 절멸 수용소로서의 역할로 확장되기 시작하자 일부 유대인 수용자들을 뽑아 시체를 처리하고 분류하며 학살업무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 존더코만도라는 시체처리반이 개설되었다. 존더코만도의 주요 업무는 학살된 수용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일이었는데, 이들 역시 수용소 내 대량학살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3,4개월마다 주기적으로 처형당하여 교체 되였다. 시체를 처리하는 존더코만도 역시 언젠가는 다른 존더코만도에게 처리 될 시체가 된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 네이버 영화

   영화 사울의 아들은 존더코만도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얼마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참혹한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사울은 여느 날처럼 토막이 난 시체를 처리하다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이후 사울은 어린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죽은 아이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고 기도문을 읽어줄 랍비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 속 사울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지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 속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자 했던 사울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는 차마 비난할 수 없었다. 사실 어린 아이는 사울의 아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아이의 장례를 치러주려고 했던 것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보일지 몰라도 나는 인간성이 처참히 파괴된 수용소 내에서 아이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유대인들에게 바치는 속죄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상영 내내 주인공인 사울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카메라는 항상 사울을 따라다니며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담음으로써 시청자로 하여금 철저한 사울의 입장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을 생생하게 바라보게끔 한다. 특히나 보통 화면 비율보다 가로가 짧은 비율을 사용했기 때문에 스크린에 비춰지는 정보량이 적어 더욱 답답하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화면에 가득 찬 사울의 표정과, 어깨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시신들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잔잔하게 끌리는 소리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나 또한 수용소에서 통제당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느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감독 또한 이런 느낌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나는 이 영화에서 배경 음악보다 청각적인 소리를 강조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함이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도록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 네이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사울의 아들보다는 재미있고 유쾌한 분위기를 지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함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극적으로 표현하여 웃음 속에 숨겨진 비극을 더욱 강조한다고 생각했다. 귀도를 보며 누군가는 오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수용소에 끌려가서도 아들에게 1등을 하면 탱크를 주는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안심시키려 하는 귀도를 통해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고된 강제 노동을 하고 온 뒤에도 아들 조슈아 앞에서는 하루 종일 너무나 재미있는 게임을 하느라 힘들었다고 웃고, 독일군에게 잡혀 처형당하러 가는 순간까지 조슈아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며 또 웃는다. 이렇게 귀도는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알려주었다. 끔찍하고 괴로운 현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조수아의 소중한 동심을 지켜주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귀도는 조슈아의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귀도뿐만 아니라 귀도와 조슈아를 위해, 죽으나 사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수용소행 기차를 탄 도라에게서 나는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희망을 알려주기 위해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귀도와 소중한 가족과 함께하려 했던 도라 덕분에 그의 아들인 조슈아는 어른이 되어서도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아들인생의 아름다워는 동일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상반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두 영화에서 다루는 현실성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배경이지만 내가 느꼈던 점이 달랐지 않을까 싶다. ‘사울의 아들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사울에게 있어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는 판타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사울을 도와주면 본인뿐만 아니라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 주변 사람들이 쉽게 사울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울의 아들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은근슬쩍 사울 어깨 너머로 흐릿하게 비춰지는 끔찍한 수용소의 배경을 통해 수용소의 현실을 전달한다면 인생은 아름다워는 보다 귀도가 아들에게 끔찍함보다 희망과 사랑을 알려주고자 했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귀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지만 시작은 어른이 된 조슈아가 이것은 동화처럼 슬프고 놀라우며 행복이 담긴 이야기다.”라고 말하며 시작된다. 귀도와 조슈아, 도라에게 있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란 무조건적으로 비극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이렇게 똑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더라도 어떻게 촬영하고 표현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나 달라진다. 내가 만약 사울이었으면, 저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아이의 장례를 치러주도록 노력했을까? 내가 만약 귀도였으면,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는 상황에 아들의 동심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여러모로 전쟁과 인생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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