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약 249개국의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는 경제 순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 10위 정도 될 것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1910년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1945년에 해방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의 6.25 전쟁은 3년 동안 일어난 나라인데 어떻게 10위가 될 수 있었을까? 그때 당시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알았을까? 아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 것일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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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의 원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큰 경제침체 위기에 빠졌다. 남쪽에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여 쌀과 같은 농업에 집중되어 발전되었다. 반면에 북쪽에서는 일제 강점을 통해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이루어졌었다. 흥남비료 공장과 수풍 수력발전소 등의 산업시설이 북쪽에 위치했다. 이러한 생산시설과 지하자원이 북한에 몰려있어 남한은 심각한 생산의 문제가 생겼다. 1950년대 초반 한국은 미국 원조를 의존하여 섬유산업과 피혁공업 등이 성장할 수 있었다. 1962년 이후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영향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도움을 받아 살아왔다. 사실 미국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닐 수도 있었다. 미국이 원조를 해주었기에 우리나라가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주로 미국으로부터 모두 무상 원조를 받아왔기에 우리나라는 경제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천천히 경제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주택을 제외한 건설 부문의 호전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현상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의 최고 수출액은 4천 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교해서 미국에 엄청난 원조가 지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조는 크게 미국과 UN의 두 가지를 통해 지원받았다. 해방 직후부터 1948년까지 GARIOA의 목적은 사회적  문제를 제어하는 것과 통화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원조는 약 4억 달러를 받았다. 1947년 잉여 물자 청산위원회(FLC) 원조도 또한 한국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ECA 원조는 장기적인 경제부흥을 위해서 실시하였는데 6·25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ECA의 원조로 사용하지 못한 원조는 미 육군성 물자 지원(SEC) 원조로 이전되었고 ECA와 SEC를 합쳐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약 2억 백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UN 한국재건단(UNKRA)에서 약 1억 2천 달러를 지원받아 산업기반 구축을 이룰 수 있었다. 휴전 협상이 이루어지는 1951년부터 UN과 미국으로 인해 경제성장을 위한 경제개발계획이 제시되었다. UN 한국재건단(UNKRA)에서 네이산에 한국경제에 대한 실태조사와 장기 부흥계획을 의뢰했다. 이것은 1953년 3월에 보고가 성사되었으며 1953년부터 1957년까지 5년으로 실행하게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한국이 1958년에 경제적 자립을 달성한다는 현실이 없는 내용과 무리한 계획 등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또한 1953년 4월, 미국은 타스카 사절단에 파견했다. 한국경제에 대한 종합적인 경제성장 방안을 위해서이다. 1953년 7월에 타스카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제출된 것은 종합경제부흥 3개년 계획이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진 장기적인 종합 경제개발 계획이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말에 미국 원조가 감소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제개발 위원회에서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이 계획은 한국이 최초로 한 경제개발계획이었으나 사회적 혼란이 있었고 여러 가지 여건이 부족함으로 인해  당시에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왜 우리나라를 위해 원조를 하였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것이다. 미국 또한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 원조를 한 것이 분명하다. 동아시아의 공산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한국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선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이유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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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의 원조가 1950년대 많이 줄었다고 한들 어느 정도의 원조는 있었다. 5·16군사정변 후 본격적으로 1962년부터  한국에서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출발했다. 경제개발계획은 외국에서 돈과 기술을  배우고 빌려서 공업을 기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었다. 그래서 한국은 값이 싸고 질도 좋은 노동력으로 물건을 제조해서 외국으로 수출하였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1차 경제개발을 시행하였다. 자립경제 달성을 위해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력 및 석탄 확보,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확충, 국토의 개발과 보전, 수출 증대, 기술발전 등의 계획을 하고 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2차 경제개발을 시행하였다. 자립경제 확립 촉진과 산업구조의 근대화를 목표로 계획했다. 그 내용은 기계공업 건설, 식량 자급자족, 철강과 화학과 과학 발전, 경영 기술 등에 대한 것이다. 1970년에는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였고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새마을 운동은 시골을 발전시키기 위해 실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마을의 길을 뚫거나 개선하고 댐 건설과 전기화 사업 등을 통해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끔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작물들을 심으려고 노력하였고 재배 작물의 품종 개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3차 경제개발을 시행했다. 안정, 성장, 균형의 조화를 목표로 두었다. 지역개발, 국제수지 개선, 산업구조의 고도화 등의 계획이었다. 또한 근로자들을 해외로 파견시켜 노동을 수출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또한 이런 계획과는 별도로 ʻ중화학 공업화ʼ 정책을 1973년에 시행하였다. 이는 한국의 국가방위 향상과 산업을 기술집약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차 경제개발을 시행했다. 능률·형평·성장을 목표로 했고 사회개발, 기술혁신, 자력 성장 구조를 설정한 것이 주요 목표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차 경제개발을 시행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뀌었다. 균형·능률·안정의 이념 아래에 국토의 균형 개발, 고용 확대와 물가 안정 등을 목표로 하여 이를 통해 국민복지 증진의 실현을 기본 목표로 설정하였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6차 경제개발을 시행했다. 국민복지 증진과 경제 선진화를 추구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산업구조조정, 국제수지 흑자, 외채 완화 등을 제시하였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7차 경제개발을 시행했다. 21세기 민족 통일 지향과 경제사회의 선진화를 바탕으로, 산업 경쟁력 강화, 자율화·국제화 진행과 통일을 이루는 노력 등을 과제로 제시했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선진국의 경제권 돌파와 성장의 강화, 국제시장 기반의 보강 등을 제시했다. 사실상 주요 경제개발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 시기였다. 이후에 전두환 대통령 정부와 노태우 대통령 정부는 은행을 민영화하기 시작하면서 금융 규제를 완화시켰고 자본통제가 대규모로 완화되었지만, 정부의 간섭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무역의 자유화였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는 금융실명제를 시행하여 오늘날 제일 잘한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하며 이자율 자유화 등을 시행했다. 또한, 점진적으로 국제금융거래 자유화를 시작했으며, 은행의 단기성 외자 도입을 허용하였다. 국제 자본거래가 자유화가 되면서 기업과 은행의 해외부채는 급속하게 늘게 되었고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의 김대중 대통령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 정부는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지원을 받았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국제 경쟁력 강화를 하기 위해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여 우리나라의 안정적인 교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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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본주의의 등장과 시장경제의 발달
  
 남한과 북한은 같은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고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지금 남한과 북한의 경제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실제로 2020년의 경우, 남한은 국내 총소득은 1,948,020십억 원이고 북한의 국민 총소득은 34,790십억 원이다. 55배나 차이가 난다. 남한의 1인당 국민 총소득은 3,762만 원이며 북한의 1인당 국민 총소득은 137.9만 원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2018년에는 2.9% 2019년에는 2.2% 2020년에는 -0.9%로 조금 아쉬운 경제성장률이긴 하지만 북한보다는 낫다. 북한은 2018년에 -4.1%, 2019년에는 0.4%, 2020년에는 -4.5%이다. 그렇다면 이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무엇일까? 남한과 북한의 가장 큰 차이는 이데올로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한은 민주주의이며 자본주의를 채택하였고 북한은 사회주의를 가지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토대로 지배하고 있다시피 한다. 북한을 비교해서 본다면 정치체제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보면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북한의 경제체제는 공산주의적 느낌으로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다고 하지만 사실 통치자가 다 가진다고 보면 된다. 거의 모든 것을 국유화하여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반면에 남한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른다. 시장의 흐름에 따라가지만 흐름이 이상해지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그렇기에 한국은  단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 국가 것인데 가능할 수가 없다. 최근 뉴스나 기사를 보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정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혁신 속도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차 빨라지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들이 새로 나오고 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집이나 음식, 문화가 바뀌었고 기술들도 진화하면서 인간의 편리함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이 업그레이드됨으로써 경제의 규모 또한 점점 바뀌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많은 아픔을 겪고 해방했지만 우리의 힘으로 해방하지 못하고 외세로 인한 해방으로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전쟁을 준비하였고 결국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962년 GNP 규모는 약 23억 달러였고 1인당 GNP는 약 87달러로 최하위 국가였다. 하지만 엄청난 발전을 통해 2008년에는 GNP 1조 달러에 육박하였다.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몰랐지만 이제는 거의 다 알 정도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전쟁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층 빌딩이 많아지고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일을 한다. 또한 이제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 개인의 능력이 발휘되며 발전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시장경제의 발달로 우리나라를 발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맺음말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파탄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방이라는 기쁨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지고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민족의 분열과 전쟁으로 인해 해방의 기쁨은 금세 사라졌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어마어마했고 우리의 힘으로는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원조를 통해 우리나라는 어떻게든 아득바득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시도하여 발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가 없었더라면 우리만의 힘으로 발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또한 원조로 인한 악영향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지. “원조로 인해 악영향이 발생했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원동력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것은 수출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원동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수출 중에서도 노동과 목숨에 대한 수출이 있는데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윤리적으로 보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서독에 보낸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수출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해외로 수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베트남 파병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수출 물량이나 보안 관련으로도 이득을 많이 보았다. 또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였기 때문에 경공업을 위주로 값싼 노동력으로 엄청나게 수출을 했다. 이후 노동자들의 인권을 생각하게 되며 제품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끌어냈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다르게 민주주의이며 자본주의이다. 이를 통해 시장경제가 발달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국민이 도구가 아니었고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만큼 받을 수 있는 자본주의였기에 열심히 노력하고 무언가를 시도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을 일으켜야 할 때는 일으키고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는 말을 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단했기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타국의 비해 우리나라만의 끈끈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선진국에 이루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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