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몽, 양주남, 1936 作

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주인공 애순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허영이 심한 여성이다. 애순은 남편과 딸을 버려둔 채 애인과 함께 호텔에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애순은 애인이 부자가 아닌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애인을 경찰에 신고한 후 마음이 있었던 무용수를 쫓아 떠난다. 무용수가 탄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순은 택시 기사에게 과속을 요구하고, 결국 딸을 치는 사고를 낸다.

미몽은 한국 영화사의 현존하는 최고(最古)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당대의 신여성 담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신여성 담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남성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담론적으로 만들어진 신여성 상은 현실보다 과장된 이미지로 전형화되었다. 구 여성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신여성은 자유연애, 자유결혼, 구질서와의 단절 등 일부 계몽적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으나, 주로 신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던 ‘모던 걸’은 퇴폐와 허영을 상징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단발, 스커트와 같은 유행, 신문물에 대한 매혹, 육체와 성애에 눈뜨는 것과 같은 욕망이 바로 모던 걸을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신문과 잡지 같은 매체에는 모던 걸들의 가십이 소모적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여성선전시대가 오면 / 조선일보 1930년 1월 12일
여성선전시대가 오면 / 조선일보 1930년 1월 12일

영화는 애순을 사치스럽고 문란한 여성으로 나타내지만, 그 속에서 애순의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애순은 남편에게 자신은 새장 속 새가 되기 싫다고 말할 만큼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인 여성이다. 당대의 신여성 담론은 허영이 가득한, 풍기 문란한 여성들이 아닌 구질서로부터의 탈피를 원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로 기록되어야 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수업에서 배웠던 ‘침묵된 집단 이론’과 연계할 수 있었다. 체리스 크라마래는 여성과 그 밖의 종속적인 집단 구성원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는 남성만큼 자유롭거나 유능하지 못하고, 그 이유는 여성이 사용하는 언어와 규범은 지배 집단, 즉 남성에 의해서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성 권력은 경험을 명명한다. 크라마래는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개념은 부정한다. 하지만 그는 성 간 권력 격차가 여성이 남성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확신한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보통의 문화에서 여성의 말은 남성의 규제와 검열에 영향을 받는다.

상징적 상호작용 주의를 떠올려 보자. 미드는 통찰력은 지식의 범위가 명명의 범위라고 주장한다. 이름표를 만드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굉장한 권력을 갖는 것이다. 남성은 경험을 명명하고, 틀 짓는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남성의 담화 속 여성은 대상화되고, 왜곡된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남성이 언어표현을 정하고, 여성은 그것에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이 부족한 사람의 침묵 구조는 언어의 지배 구조 속에서 ‘존재’는 하지만 ‘인식’은 될 수 없다.

신여성 담론 역시 남성 지식인층이 만들었던 여성 담론이다. 남성이 만드는 여성 담론은 왜곡을 포함한다. 신여성 담론이 과장되고 희화화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부정하고 싶지만 이 양상은 젠더 갈등을 겪으며 더욱이 힘을 싣고 있다. 왜곡된 여성 담론이 실재하는 여성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여성은 왜곡된, 즉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남성이 만드는 여성 담론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일제강점기의 ‘모던 걸’부터, 오늘날 갖은 수식어로 불리게 된 여성들까지, 우리는 실재하는 여성들 그대로가 드러나는 시대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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