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이 악마의 책이라 불리는 이유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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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생부터 사악하다? 맹자의 성악설이다. 이와 비슷한 이론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정치와 법을 공부하는 고등학교 시설 가장 좋아한 사상이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판단을 좋아했다고 하기보단, 국제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상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이론이자, 역사를 봤을 때 옳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법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좋아했다고 하기로 유명한 도서인 군주론은 단순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처럼 용병을 쓰지 말라는 내용의 책이 아니다. 책 내용을 보다 보면, 민중을 대할 때는 다정하거나 파멸시키는 것 중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회유보다는 압박감에 두려워하는 쪽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므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통제해도 된다는 뜻이다.


 사실 이렇게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책 자체는 정치적 지도자는 법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무슨 책이든 당시 시대 상황과 배경을 생각하면서 쳐다봐야 한다. 당시 이 책은 ‘마키아벨리’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뇌물 같은 기념으로 왕한테 바친 책이라고 한다. 항상 이런 고전적인 책들은 만들어진 시기를 항상 생각하며, 시대를 반영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종교와 관용 들을 거스리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 세대에서는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국가의 권력은 힘을 잃어간다. 말 그대로 군주가 아닌 국민이 주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2항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즉. 현대사회의 주권은 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시 군주들은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럴듯한 하나의 ‘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각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지금 시대에서는 당시 시대에서 필요한 허영심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수는 이해하는 것이 모토라고는 것이다. 인간의 품성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역사로 예시를 들어보려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주권이 절대적인 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도, 미디어도 통제당하던 시기, 언론도 통제 당하던 그 시기에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임으로 국가에 대한 반감이 적었을 지도 모른다.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들을 통제당하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통제 당하지 않는 것은 북한 속 수령님과 관련된 노래들이 전부이며, 김 씨 집권자들을 찬양하는 것들, 제제된 언론 등과 같은 것들로 인해 접하는 미디어가 그것뿐인데,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한국은 후반부에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자유라는 목소리를 접하고, 민주주의를 이뤄낸 현시점에서는 사상이 맞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자칫 잘못 읽으면, 독재를 옹호하는 듯한 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시점으로 볼 땐 독재 옹호에 대해 비판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시대 배경에서는 독재가 참이고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 시대 배경에 맞는 정치 이야기를 할 뿐인 것이다. 인간은 약하다. 약한 인간에게 당근과 채찍 중에 당근을 주게 되면 오만함으로 기어오른다. 만만해 보이는 것이다. 당시 군주 사상에선 왕권이 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잘못된 방법이다. 그렇게 때문에 군주가 힘이 강해야 하고, 오래 집권해야 하는 당시 시대 배경 상황에서는 차라리 채찍이 낫다는 것이다. 마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고문하거나, 사형을 한다는 등의 방법으로 위화감을 주기도 했다. 똑같거나 이런 행동들을 한다면 충분히 죽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안 해야지’라 생각하고 군주가 원하는 대로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원활하게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이런 무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부는 힘이 막강하지 않은 것이다. 국민들은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법은 국민의 목소리를 담고 절대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다. 헌법이라는 최고위 법도, 절대적이진 않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누군가를 옥죄매 지도 않는다. 또, 상황과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도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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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책의 시대 배경에 여전히 머물러있는 듯한 정치 성향이 유지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이를 잘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마치 같은 공산주의인 중국이 미국과 대등하여 패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은. 이 이론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에 시대 상황에 따라 정치라는 개념이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과정이 바뀌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좋아하는 책으로 이름을 떨치던 이 책은 오늘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자유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권력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원리 속에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시대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는 정도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이 밖으로 섣부르게 판단한다면 무작정 누군가를 때린 사람으로 9시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얼굴이 나올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이 책에서도 말이다. 바로, 인간은 약하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는 민중이라는 단어로 존재하는 것이 전부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시에서는 완벽하지 못하니, 그런 사람인 척이라도 해라는 것이 모토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민중을 통제하고 통솔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군주라는 사람은, 그런 민중보다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실수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괜히 정치인들이,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일어날 경우 국가가, 대통령이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자세는 현대사회에서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일어났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까지 사과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유감을 표했으나, 여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만큼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 정직이라는 것은 현대의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더라도 이 책은 악마의 책이 아닌, 과오를 되돌아보는 희대의 명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과 배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를 되돌아 봄으로써 정당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도 있다. 혹은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할 수도 있다. 또, 오늘날과 끼워 맞춰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책을 자세하게 읽어보고 해보고 싶은 것은, 미국과 미국 주변 동맹 국가들의 관계와 미국이 그 관계를 위치하기 위해 어떤 정치적인 방법과 루트를 이용하는 것인지, 어떤 현대판 군주인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고 써보고 싶다. 북한, 중국뿐만 아니라 현 러시아의 입장도 어쩌면 같을 지도 모른다. 대륙 진출, 언젠간 했어야 할 전쟁, 미국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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