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계와 미국

이 책은 세계 체제란 분석 틀을 고안한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윌러 스틴이 20세기 세계 체제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과 몰락의 역사를 분석했다.

 

출처: 알라딘
출처: 알라딘

인류 역사 이래로 미국 같은 초강대국은 없었다. 2012년 말 미국 중앙정보국 산하 국가 정보 자문 회의에 의미심장한 보고서가 등장했다. 중국이 2030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담긴 보고서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패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단극의 패권 국가는 사라지겠지만, 미국과 유럽 등의 국가가 국제사회에서의 주요한 위치는 유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 패권은 정말로 몰락할 것인가? 그 자리는 과연 중국이 차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 체제가 성립될 것인가?

 

출처: getty images
출처: getty images

2003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시기 가장 큰 화두는 911 테러와 뒤이은 아프간, 이라크전이었다. 월러스틴 역시 이 시의성 있는 주제를 통해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라크전이야말로 미국의 쇠퇴에 대한 최종적인 상징이자 증거이다. 즉 과거 헤게모니가 공고할 때에 미국은 굳이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정치적·경제적 역량의 감소로 인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프간·이라크에서 미국이 겪은 일련의 과정을 패전 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책이 나오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라크전은 종결되었고, 미국은 초유의 금융위기를 맞았다. 민주당에서는 역사적인 첫 흑인 대통령이 등장했고, 공화당에서는 세상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듯 2003년 이후 나타난 새로운 징후들과 함께 미국 패권의 몰락을 다시 돌아보고  월러스틴의 문제 제기는 과연 적절했었는지 묻고 싶다.

 

출처: pixabay
출처: pixabay

세계체제론이 기존 사회과학 이론들과 가장 구별되는 부분을 꼽자면 시간에 대한 강조, 즉 역사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존 사회과학 이론들이 주로 고정된 시간을 상정한 반면, 세계체제론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따라서 세계 체제는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거치며,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시작을 긴 16세기로부터 보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500년 역사 속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1873년의 경기 침체기부터이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을 제치며 확연한 헤게모니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파시스트에 맞서는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우위, 전시 무기 수출과 전장이 되지 않았던 탓에 온전히 유지된 생산 기반으로 인한 경제적 우위, 마셜 플랜으로 얻게 된 경제적·정치적 우위, 그리고 압도적인 군비와 기술력에 기반한 군사적 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바로 위기를 맞는다.

오히려 월러스틴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 성공하면서 동시에 헤게모니가 소멸될 조건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1960년대의 베트남전은 그 시작이었다. 압도적인 군비를 쏟아부었음에도 베트남이라는 작은 나라를 제압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서유럽과 일본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며 정치적 헤게모니에 타격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많은 것을 바꿨다. 미국의 압도적인 위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미국 헤게모니는 끝났는가? 아직까지는 유효한 듯하다. 우선 글로벌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몰락은 결코 미국만의 몰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던 날 전 세계 각국의 금융 체제는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고, 달러는 여전히 기축통화의 지위를 갖고 있다.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으로 무장한 미군 역시 지구 곳곳에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중국의 급부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초고도의 성장을 구가하더니  불과 십 년도 안 되어 미국과 함께 G2의 위치에 선 것이다.

 

출처: pixabay
출처: pixabay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당연히 국방비였다. 동맹국의 공정한 기여를 요구하며 국방비 지출의 분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이렇듯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감축하는 와중에도 아시아에서의 국방비는 감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 헤게모니가 군사적 우위에 의해서만 겨우 유지되고 있다는 월러스틴의 지적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다. 오히려 미국은 아시아로 돌아왔다며 동남아 및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중국에 대한 견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오늘은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경쟁의 시대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긍정이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권국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중국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제한적 긍정이다. 경쟁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중국이 미국과의 경쟁을 원하지 않으며 경쟁을 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부정이다. 이 경우는 논의할 바 없이 현제의 헤게모니가 유지되거나, 아니면 경쟁이 아닌 전혀 다른 맥락이 될 것이다.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정보만 본다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첫 번째에 가까울 것이다. 우선 미국은 동북아 미사일 방어 체제와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을 통해 대중국 견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모양새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북핵 문제를 보면 오히려 협조하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정답은 두 번째에 가까운가? 그럴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중국은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다. 미국이 쓰러진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도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국 간의 관계는 미국의 불안감 아래 제한적 협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미국 패권의 몰락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월러스틴의 견해를 중·미 관계에 끌고 온다면 대답은 세 번째가 될 것이다. 미국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헤게모니가 전이되는 것도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체제의 출범 말이다. 그는 지금을 50여 년에 이르는 이행의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가 헤게모니를 승계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체제를 승계하느냐가 될 것이다.

 

출처: getty images
출처: getty images

책의 내용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일본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을 간과했던 것 역시 월러스틴에 대한 물음표를 생기게 한다. 영원한 패권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미국 역시 언젠가는 몰락할 것이다. 이를 20~50년에 이르는 혼돈의 시기라 말하고, 그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도대체 어떤 적실성이 있는가. 오히려 인류사가 혼돈의 이행 시기가 아니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월러스틴이 이를 '이론'이 아닌 '관점'이라 칭했다는 걸 들었을 때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역시 월러스틴이 비판했던 과거의 사회과학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일까?

미국 패권은 몰락할 것인가? 월러스틴은 책에서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의 입장은 진짜 문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기울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국이 세계와 자신한테 최소한의 손상만 입히고 우아하게 하강하는 길을 찾느냐 아니냐라는 문장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책이 나온 후 십수 년이 넘게 지나는 동안 국제정치에 중국이라는 변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023년의 우리는 미국 패권의 몰락을 읽으며 과연 중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미국 패권의 몰락에, 나아가 체제 이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질문해야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제목처럼 미국 패권의 몰락을 설명한 부분이 아닌 제3부에서 이행의 시대 좌파의 역할에 대해 제시한 부분이었다. 뽀르뚜알레그레 정신을 확장하라거나 선거를 포함한 단기적인 방어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 중장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비전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 끊임없이 민주화를 추진하자는 점 등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어찌 보면 하나 마나한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기에 조금 더 와닿았던 듯하다. 요즘 같은 시대엔 이런 말을 보고 듣는 게 너무도 어려웠으니까. 문득 책 마지막 부분의 탈 상품화를 향해 나아가자는 부분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월러스틴은 우리가 이행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늘 명심하자고 말했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는 알 수 없다. 월러스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임은 분명하다.

 

 

저작권자 © MC (엠씨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