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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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사에선 1990년대 초반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4년을 세계화 원년으로 선언한 김영삼 정부의 정책으로 인하여 국제사회의 관심도는 매우 높아졌다. 국민의 언론에 관한 생각이 많이 변화하였다. 더 이상 언론이 권력의 하수인이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것이다. 언론계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이 증가하면서 언론 고시라는 단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언론인의 위상이 상승하면서 처우도 매우 개선되었다. 물론 장애물도 셀 수 없었다. 언론의 전문화는 대세였다. 또 다른 언론사도 전문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전문가를 찾기 힘든 신문사도 역시 직접 전문기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언론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외환위기와 함께 온 경제 위기는 우리 사회에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남기게 됐다.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온 경영난 극복을 위하여 언론사들은 대규모로 인력을 줄였다. 감소한 광고 수익금을 메꾸기 위하여 뉴스 콘텐츠에 대한 투자 줄이기 대신 언론과 관계없는 사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광고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뉴스와 분석, 기획 기사까지 줄였다. 이에 따라 언론인의 명예, 자존심은 추락하고 언론인으로서의 소명 의식이 옅어졌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클릭 수에 언론사 광고 수익이 달라진다. 연예인, 스포츠, 범죄와 같은 자극적인 뉴스가 판치는 가운데, 무거운 내용이나 고통스러운 뉴스는 외면당하기 쉽다. 과거엔 전문가 집단은 언론을 통해야지만 대중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 현재는 블로그 등과 같은 대안 미디어로 쉽게 소통할 수 있다. 콘텐츠의 좋은 질이 아닌 물량 전투 상황에서 더 고임금이고 회사 경영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전문기자는 어쩔 수 없이 천덕꾸러기가 됐다. 전문기자의 활동 분야도 국방과 의료, 환경, 법조와 여행 등으로 초기에 도입된 것에 비하여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언론사 입장에 따라서 들쑥날쑥했다. 일부 신문사에서는 전문기자와 선임기자 구분도 없고, 은퇴를 앞둔 기자들을 위하여 임시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 전문기자를 대신해 선임기자로 임명하거나 전문기자 직위가 없는 곳이 대다수였다.

질문의 주체가 달라짐에 따라 관점도 변화한다. 전문기자 제도는 처음부터 언론사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제도로 사용자의 관점이 강조됐다. 언론인인 나, 공동체의 관점은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언론의 전문성 강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언론계 종사자에게 있어 전문성 제고는 왜 필요한가, 전문기자로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몸담은 회사의 경영진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전문직 언론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른 대안은 없는가’와 같은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현황에 대한 간단한 평가, 분석을 넘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언론의 전문성과 공익성 강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언론사는 물론 언론인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 대열에 참가하도록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다.

전문기자 제도의 문제는 잊힐 만하다가도 다시금 떠오르는 언론계의 감초 역할이었다. 전문기자 제도는 뉴스 콘텐츠의 품질 향상함으로써, 경쟁에서 우세하기 위한 경영진의 선택이었다. 언론계 종사자들이 스스로 전략을 짰더라면 또 다른 제도가 채택될 가능성도 크다. 공동체 차원으로 접근해도 공동체의 필요가 강조됐을 것이다. 전문성을 증가시키려는 방안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분석하기를 통하여 그 실마리 찾기가 가능하다.

국가 간의 경쟁, 협력이 지속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저널리즘은 공론장 구축과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이 ‘가상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은 이 광장을 통해서 국가의 이익, 공공이익에 위협이 되는 사건 또는 이슈를 파악하고, 공적인 논의로 합의에 도달, 다수 참여를 이끈다. 물론, 역사상 모든 공론장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언론의 공론장 관리 능력은 언제나 비판받기 마련이었다. 공적 지식은 사회적인 지위, 교육의 수준, 경제적인 요인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편리, 공정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언론은 이 목적에 맞게 정확, 공정, 진실함과 동시에 대중 눈높이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민주공동체는 일종의 생명체다. 신체 일부가 병들기 시작하면 생명 또한 위태로워지는 것처럼, 자살, 증오, 분열은 공동체를 위협한다. 인터넷을 통하여 어느 사람이나 스스로 원하는 말을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현실에선 많은 교육을 받은, 돈이 많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의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특정 조직, 집단 이해관계 고려를 우선시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일상에서 충돌하는 상황에 공정하게 중재해 줄 역할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신하여 말하고, 권력 집단의 독단을 경계하고, 중립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공리주의를 조정하는 공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언론은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숨어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불신, 반목은 공동체에 병을 준다. 게임의 공정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 심판이 중립성이 없는 경우, 반칙, 편법이 판칠 때 더 이상 게임은 지속되기 힘들다. 그러나 중재자 또는 심판자로서 언론 전문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상당한 부분의 문제는 줄어들 것이다.

언론인은 다른 전문 집단과 비교했을 때 많은 특권을 누리는데, 일반 국민과는 달리 권력자, 유력인사와 만나고, 교류한다. 또한 각종 편의를 받기도 한다. 청와대, 국회 같은 곳을 출입하면 서민은 상상하기도 힘든 ‘정치적 자본’을 가질 수 있다. 언론의 전문성은 공적 자산이다. 공적 자산의 붕괴는 공동체 손실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공적 자산 확장, 관리와 개선 책임 또한 공동체 모두가 가지고 있다.

목표를 명확하게 아는 것, 목표 도달을 위한 실천 계획을 세우는 것과 목표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 하지만 좋은 전략이라면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전략에 있어서 제일 중요 요소 중 하난 실천 가능성이다. 모방할 수 있는 실제 모델을 관찰하면 실마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레종데트르[존재 이유]는 발견되는 것이 아닌,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공동체가 바라고 있는 언론이 무엇인가, 그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는가, 언론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이 과정에서 왜 전문성이 중요할까 고민할 때. 전문기자 제도 평가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통찰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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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들도 수익이 있어야 운영을 할 수 있고, 자극적인 뉴스가 조회 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언론인으로서의 명예와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소수의 의견을 반영한 언론사들은 국민, 국가에 외면당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입지도 추락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종군기자가 적은 편이다. 받아 적는 것에 익숙하고, 자극적인 보도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고생을 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저널리스트가 아닌 회사를 위해 일하고 돈을 받는 회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자극적인 내용 없이, 소수의 의견을 반영한 뉴스가 모두의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저널리스트 다운 의견을 내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증가시킬 수 있을까? 공리주의를 갖게 해주는 공적인 존재가 있으므로 인해 받는 비판도 있지 않을까이다. 공리주의는 행복과 쾌락만을 윤리의 원리로 삼는데, 쾌락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존재가 주관적인 것을 조정해 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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