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두 남자 "Kid milli" , "Dress"

출처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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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시절 대중음악 평단이나 마니아층이 심심할 때마다 '앨범 단위 음악의 죽음'을 개탄하는 모습을 봐왔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그 영향을 따라 이 '앨범'이라는 단위를 신봉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단위의 죽음이라는 게, 물론 안타깝지만, 그렇게까지 사수할 절대적 기준이나 가치인가 되묻게 되었다. 나는 현대의 '앨범' 단위 개념을 만든 LP 세대도 아니고, 심지어 CD 판매량도 현저히 떨어진 이후의 세대이며, 처음 내 손으로 대중음악을 담아 들은 매체인 MP3 플레이어마저 사실 동시대와 멀어진 유물이었다. “지금 파일을 왜 삽니까, 스트리밍 해서 들을 수 있는데…” 이런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고, 이미 '앨범'이라는 단위를 만들어 온 매체가 동시대성을 잃은 한참 후에 태어난 세대가, 굳이 그 가치를 사수할 의무가 있나 싶은 거다. 동시대 뮤지션들의 그 개념을 되묻는 작업들 또한 여럿 있었다. 음반과 영상 개념에 새 기준점이 된 Beyonce의 《 BEYONCE 》(2013), 《 Lemonade 》(2016)와 같은 비주얼 앨범. 피지컬 앨범 없이 스트리밍 서비스만 제공하고, 발표 이후에도 음원을 수정하며 음반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타파하는 Kanye West의 《 The Life of Pablo 》(2016)를 통한 실험. 그리고 역시 Kanye 군단의 와이오밍 프로젝트로 발표한 앨범 다섯 장은 모두 7~8곡에 20분 전후 분량으로 통일하며 '정규 앨범(regular album)'에 기대되는 길이에 의도적으로 불복했다. Tierra Whack은 아예 1분짜리 오디오 snippet만 모아 앨범《 Whack World 》(2018)으로 만들었다.

 

 한편 힙합 장르의 믹스테이프(mixtape)라는 단어는 상업 음반에도 쓰이게 되며 앨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들었고, 이를테면 Chance the Rapper의 명반 《 Acid Rap 》(2013)과 《 Coloring Book 》(2016)가 모두 '오피셜 믹스테이프'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2010년대를 휩쓴 초대형 팝 랩 스타, Drake 또한 《 So Far Gone 》(2009), 《 If You're Reading This, It's Too Late 》(2015) 등의 대표 상업 믹스테이프 작품과 함께 이 흐름의 대표 주자로 나섰다. 그는 또한, '플레이리스트'라는 개념을 자신의 '오피셜 믹스테이프' 《 More Life 》(2017) 에 도입했고, 그 개념의 실질적 효용성에 의문이 든다고는 해도, 이는 Post Malone 등의 뮤지션이 그 비슷한 개념을 차용한 이지 리스닝 및 무드 메이커 용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며 차트 강자로 군림하는 데서 나름의 의의를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본인의 첫 정규 앨범을 《 AI, THE PLAYLIST 》(2018)라 명명하며 '플레이리스트' 아이디어를 차용한 본 작의 주인공 중 하나인 래퍼 키드 밀리는 알앤비 신예 소금(sogumm)과 협업한 앨범 《 Not my fault 》(2019)로 두각을 드러낸 프로듀서 드레스(dress)와 함께 한 본 작품에서 청자에게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재배열해 만들 것을 요청한다.

 

출처 : Melon 매거진
출처 : Melon 매거진

 그러나 나는 처음, 당연히 제공된 그대로의 '음원 순서'로 재생했다. 그리고 첫 트랙 〈 V I S I O N 202 1〉을 틀고 얼마 안 가 디스토션을 가한 베이스가 등장하는 순간 진심으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 V I S I O N 2021 〉은 그 제목처럼 앨범에 비전을 제시하는데, 강렬한 뱅어 역할을 하는 베이스와 일렉트로닉 색이 드러나는 드럼 패턴, 록 사운드 베이스의 기타,  많은 트랙에 피처링해 색깔을 입힌 ron의 퍼포먼스와 더불어, 키드 밀리의 퍼포먼스는 가장 다채롭다. 이어지는 〈 Bittersweet 〉, 〈 Challenge 〉도 탁월한 뱅어로, 전자는 강렬한 트랩 비트에 캐치한 플로우로 스웨그를 얹고, 후자는 펑키한 디스코와 일렉트로닉에 영향을 받은 비트 위에서 유려한 랩으로 냉소적인 도발을 펼친다. 〈 Blow 〉에서 emo-랩으로 급작스럽게 전환하는 지점은 부자연스러웠지만, 다음 곡 〈 Citrus 〉에서 펼쳐지는 순도 높은 ‘K-모던 인디 록’스러움은 비슷한 기타 음색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 Face & Mask 〉를 마주하기는 의외였지만, 이미 앞에 두 트랙을 통해 어느 정도 분위기를 가라앉힌 가운데, 예술가의 생존 가능 여부를 코로나 사태와 엮어 던지는 질문은 본 작의 중심에서 청자에게 묵직하게 내리꽂으면서 본 작의 모든 이야기에 비추어보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제목이 무색하게 중간에 떡하니 배치되어 기계음으로 가공한 훅과 흐드러진 드럼으로 감정을 다시금 고양시키는 〈 Intro 〉는 새로운 기준 이후의 예술가 동료를 향한 모종의 선포로 보인다. 〈 Leave My Studio 〉의 멜로우(mellow)한 비트에 쓸쓸한 듯 담담한 랩은 다시금 부자연스러운 낙차를 만들지만 이와 대비되게 그 속내를 대변하는 듯 감정을 한껏 푸는 선우정아의 멋진 퍼포먼스가 빛난다. 그 먹먹함은 키드 밀리 커리어 중 손에 꼽힐 시니컬하고 화려한 랩 스킬을 선보이는 〈 Cliché 〉로 이어지고, 거기서 그가 꺼내는 수많은 정보들은 허무감에 기대어 이별과 인간관계의 상처를 꼬아 표현하며 역설적으로 스웨그를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차갑고 공격적이던 비트는 빈티지한 키보드가 탑 라인을 새기기 시작하며 분위기를 전환하고, 그렇게 〈 Bankroll 〉에 이르러서는 금속성 지닌 기타와 함께 다시 뱅어를 만들어내는데, 오케이션 파트에서 리듬이 바뀐 후 다시 주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기타가 사이키델릭한 하이라이트를 만든다. 그렇게 폭풍이 지나간 후, 포스트록 밴드 '끝없는 잔향 속에서 우리는'이 펼치는 광활한 스케일의 연주는 그동안 본 작품에서 차용해왔던 록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폭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감정적 고양의 정점을 맞이한다. 해당 트랙의 성공으로 〈 Outro 〉의 '클리셰(cliché) 적인'  발라드 스타일 비트 위로 전하는 부모와 팬을 향한 편지와 함께 본 작품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후에 나만의 순서대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들어본 뒤,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Leave My Studio 〉와 〈 Face & Mask 〉가 〈 Intro 〉보다도 전에 위치하면서 코로나 사태와 번 아웃으로 인한 냉소가 더 중요한 전제로 다가온다. 한편 〈 V I S I O N 2021 〉에서 "god bless me" 하고 끝낸 후 바로 다음 순서 〈 Cliché 〉에서 "축복." 하고 시작하는 부분은 연결점을 분명히 드러내는데, 제시된 내러티브 번호가 '플레이리스트'로서 기능한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기존 트랙 순서에서 약점으로 남았던 〈 Blow 〉가 〈 Cliché 〉와 〈 Midnight Blue 〉 사이에 끼면서 서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별 뒤엔 나에게 맞는 상대 찾아야만 했지 / […] / 내게 빚진 걔네 중에 난 아무나 골라야겠네"(〈 Cliché 〉중)라고 허무와 과시를 동시에 수행하는 문제적인 가사가 "원래 빌려 썼는데 빌려주네"와 "첫 만남에 우리 집까지 왔어 넌" 라인이 동시에 있는 〈 Blow 〉의 묘사가 더 문제적인 상황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맞이하는 〈 Midnight Blue 〉에서는 "말해줘 날 맘에 뒀다고 해"라고 요구하는 키드 밀리 파트와 "내가 사랑을 주면 넌 뭘 팔 거니" "손을 내밀면 넌 티 없이 맑은 개가 되지"라고 대답하는 안다영 파트 간의 긴장감이 더 명확히, 그리고 모순적으로 포착되면서 쿨한 듯 위태위태한 화자의 새 관계는 고양되는 연주와 함께 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긴다. 그리고 〈 Citrus 〉 또한 나름의 팬 송이던 〈 Outro 〉 뒤에 배치되면서 후일담, 연애담이자 동시에 또 하나의 팬 송으로도 들린다.

 

 나는 본 작에 대해, 음절을 이질적으로 끊어서 랩하고 호흡의 완급을 극단적으로 조절하며 이루는 독특한 그루브를 지닌 키드 밀리의 랩 스킬과, 힙합과 록 그리고 적절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각 장르 문법을 혼용하며 적극적으로 융합시킨 드레스의 프로덕션, 그 두 훌륭한 요소가 앨범 전반에 걸쳐 아낌없이 표현된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드레스의 전작 《 Not my fault 》(with 소금)에서 보인 몽환적이고 멜로딕 한 무드가 더 거칠게 변화한 건 보기에 따라서 아쉽지만, 10년대 인디 록 리바이벌의 사운드를 적절히 차용하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더욱 애매모호하게 하는 작법은 더 깊이 녹아들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래퍼 KID FRESINO가 대표작 《 ai qing 》(2018), 《 20, Stop it 》(2021) 등에서 선보인 사운드나 작법도 생각이 나는데, 그가 힙합의 문법을 올곧이 가져가면서도 타 장르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침투시키는 방법으로 점차 '팝'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는 모습이 본 작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본 작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불현듯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처음에 앨범 첫 트랙으로 〈 V I S I O N 2021 〉 대신 〈 Leave My Studio 〉를 들었으면 전체 감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본 작은 탁월한 부분 곳곳에 아쉬움도 있다. 이를테면 〈 Intro 〉의 본작에 세 곡이나 참여한 신예 ron의 보컬과 비교되며 후반부 싱잉이 아쉽고, '내러티브 순서'에서 새로 배치된 〈 Challenge 〉 - 〈 Bittersweet 〉 - 〈 Bankroll 〉 - 〈 V I S I O N 2021 〉 뱅어 라인은 댄서블 한 에너지와 별개로 중언부언하는 감을 지울 수 없으며, 〈 Blow 〉와 〈 Outro 〉의 낮은 밀도는 무드를 해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 Midnight Blue 〉 또한, 연주와 서사에서 다루는 압도적인 감정으로 상쇄할 수는 있지만, 키드 밀리의 퍼포먼스가 타 트랙에 비해 묻히는 걸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내 감상은, 곳곳의 이러한 의뭉스러운 지점들을, 처음 재생할 당시 〈 V I S I O N 2021 〉 - 〈 Bittersweet 〉 - 〈 Challenge 〉의 뱅어 폭격으로 다 '뭉개버렸고', 반대로 그것이 배치되지 않았으면 이런 단점이 더 부각되어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 가운데서 계속 고민을 거듭한다. '음원 순서'로 들으면 초반과 후반이 뱅어로 엄호하는 가운데 〈 Citrus 〉, 〈 Face & Mask 〉, 〈 Cliché 〉 등의 굵직한 트랙이 포진한다. '내러티브 순서'를 취하면 초반에 이목을 사로잡지는 않아도 기존에 파편화된 감정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순서는 또 각자 장단점을 내포하지만, 반대로 각자의 위치를 알고 재차 감상했을 때 느끼는 바가 달라지는 점에서 오히려 두 감상법은 서로를 보완한다고 볼 수도 있을까? 그런 감정에 기반한 것은 대상과의 최소한의 거리마저 무시해버린 처사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심히 오랜만에 신보를 들으며 이토록 연쇄적으로 감탄한 경험을, 결국 내가 키보드를 잡아 두드리는 글에서, 굳이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앨범에서 추천하고 싶은 트랙 (곡)

V I S I O N 2021

출처 : Youtube

Challenge

출처 : Youtube

Citrus

출처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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