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What If
오랫동안 네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상하지. 어제 네 꿈을 꿨어.
나는 가끔 네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쌓이게 되고 매번 이렇게 처음 쓰는 편지인 것처럼 편지를 쓰게 돼.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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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가 꿈에 나올 때마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던 쥰,
그 편지를 윤희에게 몰래 보내버린 마사코 고모,
그리고 그것을 먼저 발견한 새봄.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새봄이 아닌 윤희가 편지를 먼저 발견했다면, 그 '기막힌' 우연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을까? 쥰과 윤희가 20년 전처럼 다시 사랑에 빠지진 않았지만, 그 둘이 운하 시계탑 앞에서 운명적인 재회를 하는 데에는 새봄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봄이 발견하지 못한 채 쥰의 편지가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다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편함에 꽂혀 있는 것들을 모두 거두어가 땔감으로 사용할 게 아니라면, 다 갖다 팔 게 아니라면, 누군가 고의로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쥰의 편지가 오배송 문제로 분실되거나, 누군가의 실수로 땅에 버려져 바람에 휩쓸려 간다는 비극적인 상상을 해 보자.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새봄과 윤희는 일본에 가지 않았을 테고, 쥰과 윤희가 운하 시계탑 앞에서 20년 만에 재회할 일도 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걸 텍스트로 나열하니 이보다 더 비극적이고 짠한 엔딩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고 싶다. 쥰과 윤희가 재회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일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며 모르는 사람에게 축하받을 때도 쥰을 생각한 윤희와 그런 윤희가 꿈에 나올 때마다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쥰. 이 둘의 관계는 내가 함부로 다루기도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애틋하다. 극적인 재회 끝에 기적적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하길 바란다는 게 아니라, 20년 전처럼 다시 사랑할 순 없어도 너무 불행해서 아팠던 과거를 보듬어 주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해 주는 사이, 언제든지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되길 바랐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이다.
마사코 고모가 다시 한번 쥰의 편지를 몰래 윤희네로 보내는 것.
그리고 쥰의 꿈에 윤희가 자주 나타나 그만큼 쌓인 편지를 용기 내어 쥰이 직접 윤희에게 부치는 것.
사실 마음이 조금 더 기우는 쪽은 후자다. 쥰은 윤희가 결혼 후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걸 알고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 불행하고 불유쾌하게 끝나버렸던 과거 또한 쥰의 발목을 붙잡았겠지만, 자신의 편지가 윤희의 삶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처음 쓰는 듯한 편지만 방안에 가득 쌓인 게 아닐까.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병자 취급을 당하며 정신병원에 다녀야만 했던 윤희니까.
그래서 나는 윤희를 향한 쥰의 편지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의 상황과 결과를 상상한다기보다 그 상황에서 두 인물이 할 수 있는,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을 생각해 보고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쥰과 윤희, 그리고 그들과 같은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
사랑이란 이름은 같지만, 모양은 다르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 존중받는 그날까지, 나는 쥰과 윤희를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