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포토 콘텐츠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은 그날이었다.

칠흑 같은 내 세상. 방향 없이 방황만 하던 날들. 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오래된 나의 캐리어 먼저 찾아야 했다.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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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캐리어는 오래전 할머니께서 사주 신 캐리어이다. 할머니는 갓 20살이 된 손녀를 붙잡고 무작정 시장으로 데려갔다. 가판대부터 시작해 천장까지 주렁주렁 달린 가방들. 할머니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헬로키티, 어벤저스 같은 캐릭터 무늬의 캐리어, 형광색의 캐리어, 빨간 캐리어 등 종류도 색깔도 다양했다. 그중 유난히 무난하고 깔끔했던 회색 캐리어가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 캐리어를 보자마자 너무 예뻐 손이 움직였다. 아이언 같기도 한 외관은 매우 튼튼해 보이면서 빛깔이 예뻤다. 내가 캐리어를 보고 있을 때 저 너머에선 할머니가 캐리어 가격을 흥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달달 달.. 아스팔트 위에서 떨리던 캐리어 그리고 나의 몸뚱어리.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을 함께 한 나의 캐리어. 

 

베란다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녀석. 그 녀석을 보자마자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먼지가 너무 많아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지퍼는 잘 여닫히지 않고, 손잡이는 삐걱댔으며 아스팔트 위를 달리던 바퀴의 고무는 매우 거친 고무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 성한 게 어디냐며 먼 길을 여행할 친구로 요놈을 낙점했다. 이날이 그 녀석과 연락이 닿은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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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방황을 하고 있었던 친구는 우리가 가고자 했던 여행의 출발선에서 스톱을 외친 것이다. 시작을 포기한 것이다. 난 그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함께 했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난 친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는 나의 이해를 바랐지도 않았을 테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함께 가자고 한 여행에서 나 혼자 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홀로 캐리어를 여기까지 끌고 와 함께 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난 또 혼자가 되었다. 비행기 표는 표값만큼이나 비싼 수수료를 물고 나서야 환불할 수 있었다. 아무 곳이나 자리를 차지하고선 앉아 저 멀리 떠나가는 비행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였다면 저 날고 있는 비행기는 우리의 것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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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캐리어에게 미안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함 바닥을 누빈 날인데. 그런 날에 함께 날아오르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한숨만 푹 내쉬며 그렇게 한참을 날아오르는 비행기만 바라본 그때였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눈덩이 같은 것이 캐리어에 날아와 착지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고개를 드니 금발머리에 이제 막 옹알이를 떼기 시작한 어린 꼬마 아이였다. 그 꼬마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파란 눈동자가 마치 바다 같아 그 순수함에 풍덩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아이가 바라본 나의 눈은 얼마나 잿빛 하늘 같을까. 저 멀리 새하얀  눈송이를 닮은 모자를 쓰고 한 아주머니께서 달려오시더니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내 캐리어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걱정하더니 커다란 배낭에서 티슈 하나를 통째로 건네주셨다. 꽤나 급하셨는지 한 번 더 사과를 하고 서둘러 게이트로 달려가셨다. 총총총 달리는 아이의 모습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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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보이던 창가에서 뒤돌아 공항의 내부를 바라보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양한 빛깔들이 서로 교차하며 각자의 시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늘 정답이라는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오늘도 어제도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고개를 드니 의자에 누가 앉아있는지 신경 쓸게 뭐람. 일단 의자에서 일어나 어느 방향으로든 걸어야 했다. 내가 나를 움직이지 않으면 난 시공간에 멈춰있는 그림자에 불과하니까. 나에겐 조금 끈적해졌지만 달콤한 바닐라 향이 나는 캐리어가 있다. 언젠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우리 둘이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오늘의 바닐라 향 보다 더 짙은 냄새를 베이게 해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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