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2022-12-07     강수완

올해 최저임금은 9,160원이다. 1986년 처음 최저임금제도를 설립했고, 시행한 건 1988년도부터 시행했다. 1988년에는 462원이었고, 계속 오르고 오르다 지금 9,160원으로 올랐다. 한국 사회의 노동 현장에서 약육강식은 법제화 되어 있다. 그것은 곧 일상의 관행이 되었고, 먹이 사슬의 모든 단계는 적대적이다. 약자는 자신과 자기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며 살아간다. 나는 최저임금이라는 주제를 듣고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가였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가였던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했던 사건이다. 1969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 정부에게 개선을 요구했으나 바라던 요구 조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자기 몸에 불을 지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는 그날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닌, 가족들과 친구들 몰래 예전부터 계획해 왔던 것이었고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언론은 노동 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뤘고, 정부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주목받았고, 이후 한국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에 따라 2011년까지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전태일 열사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youtube

근로기준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 조건의 기준을 정하여 놓은 법률을 뜻한다.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한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했던 그때의 노동 환경은 햇빛도 없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만 의존해 하루 14시간을 일했다. 환기조차 못 하던 노동자의 노동 환경에서는 당연히 폐 질환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초과근무 수당은커녕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고, 노동자 대부분 사람이 어린 여성이었던 것을 보면서 전태일 열사는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1968년의 근로기준법은 열악했고, 심각했고, 아팠다. 전태일 열사의 유언 말고도 ‘우리에게 일주일 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해 달라,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결단코 투쟁해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pixabay

이로 인한 지금의 근로기준법은 우선 앞에서 말했듯 최저임금은 9,160원이며 일주일 근무의 총 시간은 40시간이며 이를 초과할 시 1.5배 가산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또한 급여명세서를 주지 않을 시에는 과태료 최대 500만 원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근로기준법이 발전해도 사유재산 획득은 여전히 어렵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갑과 을이 존재하고, 먹이사슬이 존재한다. 노동 환경이 열악한 곳은 아직 넘치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러 사정이 모여 있는 노동자들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 노동 사회의 한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태일 열사가 자기 몸에 불을 지르면서까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사망은 존재하고, 언론을 통해 세상에 조금이라도 알려져야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노동자에게 안전 장비를 사 준다. 그전까지는 안전 장비가 필요한 작업인데도 불구하고 사 주지 않아서 부상이 발견되거나, 노동자가 직접 산다. 또한 중간 착취도 일어나는 회사도 존재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했다가 일부를 다시 현금으로 갈취하는 수법으로 중간 착취하고 있었다. 이처럼 황당한 수법을 쓰는 이유는 직원들에게 적정하게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통장에 남기기 위해서다.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는 이 수법이 당연할 테고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이러한 수법은 2014년까지 이어졌는데, 직원들이 직접 나선 후에야 이 악습은 사라졌다. 이런 악습은 많다. 휴가 수당을 주지 않는다든지, 초과수당을 주지 않는다든지 아직 중간 착취와 악습은 존재한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이 헛되지 않은 사회가 변질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고, 사회의 한계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과 여러 노동 운동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우리 사회는 그 한계를 깨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