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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년, 리버풀의 역사 #3
배웅기  |  baeverpoo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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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09  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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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풀 에코

1959~1985

필 테일러(Phil Taylor) 감독 사임 후 리버풀 사령탑에 앉은 건 빌 샹클리(Bill Shankly) 감독이었다. 허더스필드 타운을 떠나 머지사이드에 도착한 샹클리는 취임 직후 리버풀을 세계 최고의 팀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리버풀은 예전의 영광과 달리 디비전 2(2부 리그격)에서 허우적대는 팀이었고, 샹클리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샹클리가 먼저 손을 본 것은 구단 그 자체였다. 홈경기장 안필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구조적 문제를 손봤고 선수단 역시 물갈이했다. 무려 24명이라는 규모였다. 리버풀에 오랜 시간을 바친 선수들임은 틀림없지만 샹클리는 선수단 수준이 좀 더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샹클리는 부트룸(Bootroom)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라커룸 안 선수들이 신발을 두는 공간에 자그마하게라도 코칭스태프진의 회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샹클리는 부임 3년 후이던 1962년에 디비전 1(1부 리그격) 승격을 이루었다. 예전에 비해 풋볼 리그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비전 1에서의 영광 또한 차지할 수 있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디비전 2에서 승격을 장담할 수 없던 팀이 1964년, 디비전 1 우승 트로피를 재탈환한 것이었다.

   
▲ ⓒ디스 이즈 안필드

이후 리버풀은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컵(現 UEFA 챔피언스리그 전신) 출전권을 얻게 된다. 리버풀 대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도 이쯤 해서 안필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2020년 현재에도 YNWA는 안필드의 일부가 되어있다. 1965년에는 FA컵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 올리게 됐고, 이는 리버풀 창단 73년 만의 첫 FA컵 우승이었다.

샹클리는 리버풀을 세계에서 제일 가는 팀 중 하나로 만들었고, 1971년에 당대 최고의 공격수 케빈 키건(Kevin Keegan)이 합류함으로써 리버풀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결국 1973년에 디비전 1과 UEFA컵(現 UEFA 유로파리그 전신) 우승을 모두 이뤄내면서 더블을 달성했고, 1974년 FA컵 우승 트로피를 다시 리버풀로 가져오며 샹클리는 은퇴를 선언한다.

샹클리는 축구계를 떠나기 전 후임으로 부트룸 코치 밥 페이즐리(Bob Paisley)를 낙점했다. 페이즐리는 2020년 현재에도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알렉스 퍼거슨 경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명예를 얻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리버풀에서 이뤄낸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지네딘 지단이 2018년 UCL 3연패를 이뤄내기 전 한 클럽 소속으로 빅 이어(UCL 트로피)를 3번 들어 올린 인물로는 페이즐리가 유일했다.

1976-77시즌 페이즐리는 디비전 1 우승 트로피는 물론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팬들에게 선사했다. FA컵 결승전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며 아쉽게도 트레블은 실패했지만, 페이즐리 리버풀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즌이었다. 이후 키건이 함부르크 SV로 떠났고, 리버풀은 그의 대체자를 영입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셀틱까지 건너간다.

   
▲ ⓒESPN

페이즐리가 셀틱에서 데려온 공격수는 다름 아닌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였다. 국내 축구팬들에게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리버풀 감독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달글리시는 1970~90년대 선수 및 감독으로 이미 세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키건이 워낙 뛰어난 공격수였기 때문에 달글리시가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존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달글리시는 첫 시즌만에 리버풀 팬들의 기억 속에서 키건을 지워주었다.

시간이 흘러 1981년, 리버풀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며 역사에 남을 세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에 성공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반면 리버풀은 리그에서 다소 부진하며 5위에 그쳤다. 하지만 리버풀은 레알 마드리드가 다소 우세하지 않는가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집으며 빅 이어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1983년을 끝으로 페이즐리는 리버풀을 떠났다. 리버풀은 이미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가 아닌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페이즐리는 리버풀에서 유러피언컵 3회 우승, 디비전 1 6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 등의 대업적을 남겼다. 총 20개의 우승 트로피가 리버풀 트로피 진열장에 들어찼다. FA컵과 인연이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완벽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후임 사령탑으로는 샹클리, 페이즐리와 함께 부트룸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조 페이건(Joe Fagan)이 등장했다. 리버풀에서 25년 동안 코치 생활을 한 페이건의 나이는 적지 않았다. 감독 부임 당시였던 1983년 페이건의 나이는 62세로, 머지않아 축구계에서 은퇴할 것임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건은 샹클리-페이즐리에 이어 영광을 이어갔다. 첫 시즌부터 유러피언컵 우승에 성공했고, 디비전 1과 리그컵 우승 트로피까지 가져온 것이다.

   
▲ ⓒ마르카

이때 리버풀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AS 로마를 만났는데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Bruce Grobbelaar)의 퍼포먼스가 압권이었다. 최종 스코어 1-1, 승부차기로 향한 두 팀은 엄청난 긴장감 속에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그로벨라의 퍼포먼스는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로벨라가 일명 스파게티 댄스(Spaghetti Dance)를 선보인 것이다. 골대 앞에서 온몸을 스파게티처럼 꿈틀댔고, 이에 당황한 상대 선수들은 심리전에서 완전히 휘말리며 리버풀에게 빅 이어를 내줬다.

그로벨라의 스파게티 댄스는 21년 후인 UCL 결승전에서 다시 한 번 재연된다. 리버풀은 2005년, 21년 만에 빅 이어를 탈환하기 위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AC 밀란을 만난다. 이 당시 리버풀의 골키퍼는 예지 두덱(Jerzy Dudek). 리버풀 부주장 제이미 캐러거(Jamie Carragher)는 승부차기 직전 두덱에게 "그로벨라처럼 스파게티 댄스를 춰."라고 지시하는데, 이 이야기는 21세기 리버풀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후술하도록 하겠다.

다시 1984년으로 돌아와 리버풀은 페이건 아래 승승장구하며 영광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 기쁨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1985년 다시 한 번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한 리버풀. 상대는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에 도전하는 미셸 플라티니의 유벤투스였다. 리버풀은 유벤투스에게 패했지만,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날 '헤이젤 참사'라는 축구 역사상 가장 아픈 사건이 일어나면서 잉글랜드 축구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폭삭 주저앉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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