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역사로의 시간 여행

대구 중구는 ‘근대路의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5코스의 골목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근대적 의미를 갖춘 곳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한국 근대사는 보편적으로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인한 개항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전까지로 정의하고 있다.) 햇볕도 바람도 적당하던 지난 5월 31일, 나만의 힐링을 찾아 대구 도심 속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근대 역사관 두 곳을 방문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대구 근대역사관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계절과 요일에 따라 다르니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 대구 근대역사관의 외관 ©허나희

중앙로역 4번 출구에서 도보 6분 거리에 있는 대구 근대역사관은 건물부터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 시기이던 1923년에 건립된 조선식산은행 대구 지점을 개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대 역사관에 들어서면 ‘조선식산은행실’을 가장 먼저 관람하게 된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가 조선의 자금을 수탈하고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설립했다. 당시 대구지점에서 사용되었던 금고 열쇠와 화폐, 수표, 적금 영수증, 주판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의 모형이다. 외관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의 모형 ©허나희

대한제국부터 현재까지 대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 연표실’과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대구의 과정을 담은 ‘근대의 태동’을 보고 나면 ‘부영버스 영상 체험실’에 다다르게 된다. 참고로 대구는 대한민국 최초로 시내버스인 부영버스를 도입하고 운영했다.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앞에 세워져 있는 버스로 들어가서 나무로 된 버스 좌석에 앉으면 영상이 시작된다. “다 타셨으면 오라이!”를 외치는 안내원과 함께 근대 대구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경적과 덜커덩 소리 그리고 입체적인 건물 표현은 실제 운행 중인 버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몰입을 높인다.

▲ 부영버스 영상 체험실의 모습 ©허나희

‘구국의 정신’에서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독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3월 8일,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며 대구 시민들도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대구의 의열투쟁과 비밀 결사 운동 등은 경북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대구인 만큼 이에 대한 설명도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게재한 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 자 신문) ©허나희

이 외에도 대구의 근대적 문화와 교육을 다양한 시각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고, 근대 산업도시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 해성 보통학교의 졸업 기념첩(왼쪽)과 대구 수창 공립초등학교의 상장(오른쪽) ©허나희

대구 근대역사관 2층에 있는 기획전시실에서는 올해 9월 1일까지 일제 강점기 시절 대구 번화가였던 향촌동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전선 문학과 향촌동 수제화 골목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획 전시실 옆 사진엽서에 담긴 근대 대구 풍경과 곳곳에 걸려있는 대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언제나 만나 볼 수 있으니 2층까지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 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 중 과거 서문시장의 사진 ©허나희

 

두 번째로 둘러본 곳은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으로 중앙로역 4번 출구에서는 도보 6분, 대구 근대역사관에서는 도보 2분 거리에 있다. 관람료는 어른 기준 2,000원이며, 관람은 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능하다.  역사관 토크 및 콘서트, 평화 인권 캠프 등의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고 하니 홈페이지를 통해 진행 중인 프로그램 일정을 확인하고 방문한다면 더 알찬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외관 ©허나희

정신대, 종군위안부 등으로도 불리는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뜻한다. 일본 육군성은 1932년 만주사변 직후부터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전쟁 중 일본군의 성욕해결과 동시에 성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성병 검사를 거친 여성들을 동원하여 위안소를 설치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 및 많은 여성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강제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올바른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더 나아가 평화와 여성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1층 전시실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한 설명과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 태블릿을 활용한 일본군 위안소 지도와 피해자들의 증언 ©허나희

다른 쪽 벽면에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의 위안부 문제 해결 과정에 대해 피해자 관점에서 연표 형식으로 나타냈다. 1943년 위안부로 끌려갈 뻔했던 윤정옥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1990년 1월 한겨레 신문에 일본군 위안부 취재기에 관한 내용을 연재하면서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후 윤정옥 교수의 조사가 알려졌고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학순 씨가 처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공개 증언했고, 1991년 12월 2일에는 대구에 살고 있던 문옥주 씨가 자신도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는 등의 피해자 신고가 이어졌다. 피해자 여성들의 증언과 위안소 관련 정부 문서들이 밝혀짐에 따라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사죄를 표명했지만,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은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1997년부터 사용되는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였으나, 일본 정치가들과 우익 단체들의 지속적인 비난으로 삭제·축소되기 시작하더니 2011년에는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진정한 반성과 사죄 없이는 용서와 화해는 없다고 주장하며 철저한 진상 규명과 미래 세대에 대한 교육을 촉구하고 있다. 1층 전시실 옆 벙커에서는 피해자들이 각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일본에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의 내용을 담은 10분 정도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분노가 글자로 볼 때보다 확연히 전해졌다.

2층 전시실에는 ‘그녀들의 용기, 우리들의 #WITH_YOU’라는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 기간은 지난 2월 16일까지로 되어있었지만, 필자가 방문한 5월 말까지도 계속 전시 중이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피해자들의 종전 이후 삶을 구체적으로 담았으며, 최초로 피해 증언을 한 김학순 씨의 뉴스 보도 영상과 피해자들이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 등을 영상, 그림, 사진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 외에도 피해자들의 저서와 유품도 전시되어 있었고 그녀들의 응원하는 방문객들이 응원 메시지를 작성하고 붙이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 희움 티켓 뒤로 보이는 희움 건물 ©허나희

작년 12월 21일, 전국 대학 캠퍼스 중 최초로 대구대학교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수업에 늦을까 발걸음을 재촉하며 무심히 지나치던 소녀상이었는데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을 다녀온 후 그들의 평범한 삶을 빼앗은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 대구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허나희

 

역사관의 벽은 생각보다 높지 않고, 두 곳 모두 중앙로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기에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꼭 근대 역사를 알아보러 간다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들 만나러 가는데 여유가 있다거나 점점 더워질 대구의 여름 속에서 잠시 쉴 공간이 필요하다면 역사관을 방문해보는 것이 어떨까? 시원한 곳에서 얻는 값진 경험, 나만의 힐링을 찾아 역사관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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