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 <솔로 강아지>

한 초등학생이 쓴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제목의 시가 한국사회의 검열에 걸렸다. 어른이라는 기득권층은 피폐해진 사회에서 그들의 이념을 계승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이념 통치 교육’을 목적으로 문화 정치를 실행한다. 문화 정치를 거부하는 이에게 한국사회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자연화한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행위로 잔혹하고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나누는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지식인과 권력을 가진 주류층인 어른이다.

 

▲ ⓒ 예스24

 

학교를 감옥으로 느끼는 학생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억압당한다. 이 학생은 어른의 정상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예쁜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으로 아이는 착하다고 평가를 받는다. 착하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의미일까? 오히려 착하다라는 당근을 주며 주체적 자아와 객관적 자아의 분열을 유도한다. 아이는 사회가 추구하는 규율에 맞게 만들어진다. 아이 본인의 ‘취향’은 없다.

 

‘착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나를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억압받는부조리한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착한 것인지. 교육을 비롯한 스마트 파워를 통해 억압하는 사회는 심화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국가는 아이로부터 무엇을 조작하는지’ 등 집단기억 작용을 통하여 집단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아이는 사회의 규율을 학습하며 자라나 기득권층인 어른이 된다. 자신의 부조리한 행위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 아이라는 집단정체성을 만들어 어른에 대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시(poet)’라는 문학은 나이가 많거나 지식이 풍부하다고 모든 시적 세계와 의미를 파악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시를 만든 이조차 시를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시를 객관적 사실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학원가기 싫은 날’은 사실적 세계-너머의 세계이다. 다층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처럼 ‘학원가기 싫은 날’에 대한 한국사회의 검열은 정당화될 수 없다. 21세에 개인의 자유를 검열하고 통제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일까? 한 인간의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어른은 아이를 동등한 주체로 대우하고 있는가? 아이도 한 인간으로 어른과 평등한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인 어른은 자신이 식민지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채 아이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국가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립심을 기르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 아이는 영화<트루먼쇼>의 트루만이 되었다. 트루만은 정보를 비판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회에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파괴점를 찾았다. 어른은 자기도 언젠가 아이였다는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아이를 억업하는 사회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인위적인 세팅에서 어떻게 탈출을 시도할 것인지 고민을 해야한다. 기득권층은 <트루만쇼>의 감독역처럼 “넌 여길 떠날 수 없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 청년을 비롯한 어른은 트루만처럼 “안녕.”하고 나갈 수 있도록 돋움판이 되어야 한다.

 

사회에 반하는 행위가 있어야 사회는 올바르게 성장한다. 이처럼 개인 행위에 대한 억압이 과연 옳은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아이라는 소수 집단이 어른이라는 주류 집단에게 억압을 받는다. 집단과 집단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본질적인 어른은 왜 아동을 억압하는가 그리고 앞서 밝혔듯 아이라는 집단정체성을 만들어 어른에게 대항할 수 있고 그들이 스스로 사회 규율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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