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선 안되는 수치스런 이름들.

  하판락, 노덕술, 김창용, 김덕기 이 네사람의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이 네사람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일은 한 사람인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 일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매국노, 친일파, 일본의 앞잡이라는 수식어가 모자를 정도다. 

▲ [ⓒMBC] 하판락

  하판락은 경남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6년도에 일제의 치하 아래 순경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경찰로만 일했다면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독립 운동가를 잡고, 고문하기로 유명한 '고등경찰'로 일했다. 그는 경남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근무할 때 불리던 별명은 '고문귀' 였다. 그가 고문귀 이름을 날린 시초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교인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경수, 이미경, 이광우를 체포하고 자백을 강요하며 고문을 했다. 화롯불에 달군 쇠젓가락을 지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기고문, 물고문을 자행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의해 불구가 되었다. 이광우 선생이 말하길 "고문을 기다리는 것과 고문을 지켜보는 것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고 회고했다. 정말 얄궂은 운명이었던 것은 이광우 선생의 아들이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하판락에게 가서 증언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광우 선생은 아들에게 하판락을 보거든 죽이라고 했다고 한다.

▲ [ⓒ노컷뉴스]

  노덕술도 마찬가지로 일제 치하 아래 고문으로 유명했던 경찰이었다. 그는 사법경찰로 경찰 일을 시작했다. 고등경찰도 아니었던 그가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취조하고, 고문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고등경찰이 되었다.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었다는 말이다. 노덕술은 고문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혁조회 사건을 취조하며 혀를 빼는 고문과 머리카락을 잡아 뽑는 고문을 자행했다. 노덕술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부를 쌓았다. 해방되었을 때 그의 재산은 현재가치로 100억쯤 되었다고 한다. 그 부를 어떻게 쌓았을지는 뻔하다.

  이 두 명의 공통점은 반민특위에 의해 잡혔다가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끝이 나도 그들의 권력은 무너지지 않고 건재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의 재등용 정책으로 관직을 이어갔다. 반민특위에 잡혔다가 풀린 후에 하판락은 사업가로 변신해서 부산에서 사업을 일으켜 크게 번창하고 그 후손까지 잘살고 있다. 노덕술 또한 재등용 정책으로 경찰 일을 이어갔다. 반공 인사를 잡아들여서 고문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반민특위에 잡힐 위기에 처하자 노덕술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을 기획한다.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풀어주라’ 고 한다.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하고, 노덕술은 다시 경찰 일을 이어간다.

  김덕기 또한 친일 경찰이었다. 1913년에 일제 경찰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잡힌 독립운동, 반일 인사가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체포된 인사 중에 안창호 선생, 조봉암 선생, 박헌영 선생 등이 있었다. 김덕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독립 운동가가 그의 손에 잡혔다.

▲ [ⓒ위키백과]

  김창용은 군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1941년에 일제 군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했다. 항일 단체를 감시하고, 43년도에서 45년도까지 50여개의 친일 단체를 검거했다. 해방되고 반공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어릴 적에 본 야인시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김두한과 끊임없이 대결 구도를 펼치던 일본 경찰인 미와 경부가 독립되자 권총으로 만세를 외치고 자살을 하는 장면이었다.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행위도 기억에 남는데 한몫했지만, 일본 순사가 독립을 맞자 죽음을 맞는다는 정의로운 구도 때문에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현실은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 친일파 청산은 없었고, 단죄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독립투사 김원봉 선생이 북으로 넘어간 이유에 노덕술의 영향이 있다고 말한다. 전국 노동조합 평의회 총파업 배후로 체포된 김원봉 선생의 취조를 노덕술이 맡는다. 해방이 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인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수치를 당한다. 김원봉 선생은 풀려나서 전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 가서 사흘 밤을 꼬박 울었다고 한다. 반공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친일파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독립운동가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준 사례인 것 같다. 이 사례 하나만 보더라도 이 치욕스러운 이름과 역사를 잊어서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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