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출처 : 리디북스

 

"지치면 안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수레바퀴 아래서(Untern Rad)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만 헤세가 1906년에 발표한 자전 소설이자 비판 소설이다.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진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한 후, 시계 부품 공장과 서점을 전전한 경험을 소재로 했다.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는 자연을 사랑하고 사색을 사랑했으나 기숙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경쇠약으로 앓다가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모를 익사사고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된다. 한스는 마을에서 총망받는 학생이었다. 부모님들의 기대에 따라서 공부의 일변도를 걸으면서 자신의 욕망들을 차단하며 살아간 한스는 자신의 안에서 말하는 욕망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학교생활과 점점 멀어졌다. 이런 한스의 행보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명예를 실추하는 계기가 된다.

 

이 소설을 읽는내내 한국의 사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삶에 대한 이정표를 스스로 찾지 못한 채로 부모의 등살에 떠밀려서 공부를 하고,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오는 성취감은 이내 가신 뒤에 어릴 때 하지 못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함에따라 오는 무기력함이 한국과 닮아 있는 듯했다. 우리 사회는 왜 학구열이 높다 못해서 학생을 불행에 빠트리는 것일까? 이 전제는 물론 교육을 받음에 따라서 좋은 효과를 받는 학생도 있지만 부모의 학구열 혹은 공부 일변도의 길에서 탈락하면 실패자가 된다라는 자신의 생각에 등떠밀려 불행의 길을 걷는 학생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한국의 학구열은 경쟁과 삶의 질에 기반한다. 상대적 평가를 하고있는 한국의 학교에서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는 타인을 머리를 밟고 올라가야하고, 그래야만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에 기반한 것이며 이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좋은 성적, 좋은 대학교, 대기업, 고연봉과 같은 정해진 길을 가야하며, 이 정형화된 길의 시작은 높은 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다. 현대의 사회는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를 물을 때면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말하고 자신이 가진 자산의 규모를 언급하는 시대이다. 사물이 가진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가 실재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사회인 것이다. 당장 인스타그램을 보더라도 자신이 가진 자본의 규모를 과시하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리고, 자아의 만족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진정 인간이 만든 사물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일까?

 

출처 : 중앙일보

 

필자는 진정한 의미의 ‘부’란 물질적 풍요보단 내재적 풍요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정 수준이상의 물질은 삶을 지속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삶의 목표가 된 뒤에는 언젠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교육은 사회적 규범의 정착 혹은 인간적 인성을 함양하는데 주안점을 둬야하며 이는 신분상승의 목표만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 개인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타인과는 다른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을 도와주는 것인데, 한국은 획일화되고 암기주의적인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 지적인 욕망을 어릴 때부터 잃어버리게 만드는 교육의 방향과 성과주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생산적인 사회적 담론, 창의적인 논문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하고 소위말하는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을 비꼬자하는 저의는 아니지만 사회가 더욱 발전하려면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당장 선진국에 반열에 올라있는 독일만 보더라도 아우스빌둥과 대학교를 나눔으로써 진정으로 학문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대학교로,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은 아우스빌둥에 가서 직업교육을 받는다. 물론 이런 시스템의 구축도 중요하겠으나 직업의 귀천이 없다는 시민의식 또한 중추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에 대한 거시적인 시야이며 편견의 극복인 듯하다. 한스 기벤라트가 받은 교육의 압박과 부담감은 문학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성과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에 주안점을 둔 교육이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아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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