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호로비츠 《관찰의 인문학》

출처 - YES24

 

“우리는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위의 구절은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저서 《관찰의 인문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정 현대인들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제대로 보지 못한다기보다는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그리고 현실을 앞에 두고 디지털 화면을 응시하며 그것을 ‘봤다고’ 착각한다. 디지털 문명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그 위에서 끝없이 착각하며 살아간다. 오죽하면 스몸비(Smartphone + Zombie)라는 신조어가 나왔겠는가.
 

출처 - 한국경제


미술의 장르 중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한글로 번역하면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관람객에게 의도적으로 현실과 가상사이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미술 장르이다. 이 그림을 보면 “현실을 고도의 기술로 모조한 작품이다.”, “짝퉁이다.”라고 하면서 비판을 퍼붓지만 사실 이러한 반응은 하이퍼리얼리즘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다. “실제와 유사하게 그릴 것이라면 사진을 찍으면 되는 것인데 왜 시간과 노동력을 감내하면서까지 현실과 유사하게 그리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하이퍼리얼리즘 장르의 예술가들은 오히려 현실과 가상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단순히 현실의 시간을 정지시켜서 포착한 사진보다는 그림을 그린다고 밝힌다.

호모 사피엔스는 구석기, 신석기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1, 2, 3차 혁명을 일으켰다. 시대가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잉여자원은 날이 갈수록 증대했고, 그 자원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자원을 약탈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등 서로를 견제했고, 자원(권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명의 지도자를 두고 자신을 보호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사회라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울타리 안에 사회가 존재했다. 시대가 갈수록 잉여자원이 비대해지고 합의를 통해 구축한 사회 내에서 자원을 독점하는 권력층이 형성되면서 사회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사회의 의미가 역전된 것이다. 지금과 같이 사회 안에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인데, 그때부터 점진적으로 인간을 위한 사회의 색을 바래기 시작했고 사회를 위한 인간이 대두되었다.

미국의 메릴린치가 투자자들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매트릭스가 실제일 가능성이 20~50%에 육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가능한 것인지는 검증 해봐야할 것이지만 그들의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의 세계에서 진정으로 집중해야할 과제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무엇을 의식하면서, 무엇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까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존재론적인 의미에 대해서 질문해야하지 않을까. 현실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으로 일어서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간다한들 온전 현실의 나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이 진짜인가? 사회인가 ‘나’라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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