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출처 - 도서출판 돌베개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즘에 저항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레지스탕스. 그들의 동기는 분노였다. 그리고 레지스탕스에 기꺼이 합류한 스물다섯의 프랑스 젊은이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이렇게 말한다. “분노의 이유는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였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독립을 넘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국기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였다. 그리고 곧 그들은 프랑스를 지켜냈고, 그들의 정신은 프랑스의 기반이 되어서 레지스탕스의 정신 위에 프랑스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 평등, 박애 위에 세워진 국가라고 하더라도 분노의 종결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에 분노의 종결이 가능하고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 국가의 주권을 다 차지하고 있는 전체주의 국가 이거나 모든 사람이 꿈꾸는 유토피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분노의 종결에 대한 현실성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분노의 종결은 인류의 종결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분노하고 행동하고 진보했기 때문에 분노라는 시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진보는 불가능할 것이다.

 

출처 - 한겨레

불법 체류자 및 이민정책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대우, 퇴직연금 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후퇴, 부자들에게 장악되는 언론매체의 구조적 한계, 민주주의의 퇴보 등 오늘날의 시민들은 분노의 스파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먼지와 같다. 스치면 불꽃을 만들어낼 테지만 누구도 자신을 희생하며 개선의 불꽃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사회 운동가, 그리고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스테판 에셀은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분노하라” 하지만 그 분노는 비폭력에 기반을 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외치는 희망을 품은 분노이다. 우리는 95세에 작고한 그에게 ‘영원한 젊은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를 보면서 ‘젊음’, ‘청춘’과 같은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누구나 거치는 단어인 줄 알았던 것을 마치 ‘작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자. 조선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진리이더라도 혹은 정의이더라도 성공을 위해서라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자에게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던 잘못된 권력에 반기를 들었던 이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 자손들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혹은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 어떤 부정이 자행되어도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 고개 숙이고 외면했던 우리의 역사는, 귀를 막고 손바닥을 비비고 비굴하게 삶을 살아가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부모님들은 “튀는 사람이 되지 마라.”, “모난 돌이 되어서 정을 맞지 마라.”라는 말을 가훈처럼 사용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같이 80년대에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 고문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이 바꿔온 대한민국의 발자국 위에서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바른 소리를 하는 자가 권력을 쟁취하는 역사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그리고 정치를 떳떳하게 바라보고 정의를 얘기하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 기저에서 작동하는 핵심요소는 비폭력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분노일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보면서 우리의 나라도 권력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 미시 파시즘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는 시민이 보편화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시대에서 안정적이고 높은 이에게 복종하며 눈치를 보며 살면서 밥 먹고 살고 고개를 조아리며 승진의 가도에 오르는 사무직 공무원이 미래직업 1순위가 된 세태에서 우리는 분노할 수 있는가. 분노는 사람이 존재하고 사회가 지금까지 진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의 젊음에게 분노란 무엇인가. 스테판 에셀은 생존과 소신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이 시대의 모든 젊음에게 이렇게 말한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절대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시민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정치의 암막이 다시 시민을 덮을 것이고 그때서야 꽃이 진 것을 보고 봄이었다는 것을 자각할 것이다. 한 명의 시민은, 호모 사피엔스는 분노해야 한다. 그 다소 높아 보이는 산을 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는 기득권,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일으키는 부당한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고 느낌표를 얻어내야 한다. 파시즘의 어원은 몽둥이라는 것이다. 몽둥이로 패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 그것인 비단 물리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상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에 내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분노하는 마음이 끓어올라야 하고 개혁의 의지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 그 분노는 자신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한 ‘찌질한 분노’가 아닌 타인을 위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거룩한 분노’여야 한다. 물론 거룩한 분노를 부당한 권력과 기성의 어떤 사람들, 것들에게 표출하는 매개는 논리적이고 감정적이지 않은 어조로 대화 속에 잠재된 보편적인 양심, 윤리 그리고 가치를 이끌어 내는 비폭력적인 수단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 자식의 행복, 그리고 이 세계의 어떤 이들의 행복을 지켜나가는 한 걸음이 되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불편함을 참으며 세상을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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