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뮤니케이션북스

`말과 힘`

프랑수아 샤틀레의 <플라톤>에서는 한 가지 사실을 곱씹어보게 한다. 이 당시의 아테네 상황은 대외적으로는 다른 종족들과의 전쟁이, 대내적으로는 권력과 재산을 둘러싼 시민들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을 택했다. 다만, 그 말은 단순히 독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순한 독백에 머무르면 편협하고 독단적이며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말은 알맞는 질문과 대답이 끝없이 이어지는 진실한 대결로서의 대화여야 한다. 그리하여 샤틀레는 플라톤 철학이 주는 의미를 "대화야말로 진정한 관계이다"라고 정의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대화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 대신 말` , `폭력 아닌 대화`라는 하나의 선택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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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서의 말`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는 자기 이론의 중심 개념들을 통해 인간 언어활동의 의미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이 학자는 `말 대 힘` , `언어 대 폭력`이라는 대립 쌍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하여 물음을 제시한다. 이 물음에 부르디외는 언어활동은 상징적인 층위에서 행사되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언어활동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심지어 폭력과 상반되는 것으로까지 인식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더 효과적인 폭력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는 지배질서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상징적 매개물이라는 말이다. 실제 사례를 들어 얘기하자면 1995년 프랑스 우파 정부는 국가 재정의 합리화를 명분으로 공기업의 구조조정과 연금제도의 개혁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하였고, 당시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은 정부를 지지하는 지식인과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 간의 발언을 방영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부르디외의 분석에 따르면, 언어 교환이 내포하는 이중적인 폭력성을 드러낸다. 즉 언어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정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말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그 언어들을 통하여 벌어지는 논쟁들은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싸움이 된다고 말한다. 지배집단의 언어가 당연한 상식이라는 듯이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주장은 결국 대화 속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권력을 고발한다.

`그래도 말의 힘을 믿는다는 것`

이렇게 많은 학자의 대립하는 주장들을 가지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다고 말하려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 충돌하는 접근들을 통합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즉, 커뮤니케이션이 `폭력을 넘어서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이 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갖는 내포한 뜻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또한, 구체적으로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가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뤄져야만 하는 흉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흉기 즉, 언어는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치고 집단을 낙인찍으며, 사건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체제가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한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이 `차악의 폭력`이자 `대안적인 폭력`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폭력`인 물리적, 신체적 폭력과 달리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폭력`인 상징 폭력은 타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폭력성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을 연다는 점에서 `폭력을 넘어서는 폭력`이다.

`성찰적 커뮤니케이션 공부를 위해`

자신이 커뮤니케이션 공부를 하면서 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설득할 것인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펼쳐지는 장으로서 이 사회는 어떤 곳이며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단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학문을 열심히 익히되, 그것을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와 방향을 생각하며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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