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커뮤니케이션북스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이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대답하려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다는 것'과 '커뮤니케이션'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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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에서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대화 상황이었다.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만나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주주의가 발생한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아테네는 안팎으로 크고 작은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폭력 대신 말을, 또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말을 선택한 그리스인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단순히 의견의 독백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의견에는 개인의 욕망, 열정, 이해타산을 깔고 있다. 그래서 편협하고 독단적이며 자기 중신적이 되기 쉽다. 자기 확신에 빠진 의견들만이 일방적으로 난무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결국 힘의 논리가 될 뿐이다. 말은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는 대화여야만 한다. 대화라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의 한계라는 점을 인정한다.

 

칼리클레스는 전제군주의 권력을 부러워하며 그러한 군주가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납득하여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질문과 답변 과정을 통해 자기주장의 허술한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폴루스와  칼리클레스에게 "논박하기도 하고 논박을 받기도 하는" 대화를 권장했다. 따라서 샤틀레는 플라톤의 철학이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대화야말로 진정한 관계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생성되는 공통 공간이야말로 철학, 민주주의의 시작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관계의 대화가 무엇보다 어떤 결단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쓸 수 있는 힘의 논리, 동물적 존재로서의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폭력의 사술을 끊어 내겠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대화를 통한 타인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힘 대신 말', '폭력 아닌 대화'라는 선택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고르기아스』와 짝을 지어 떠오르는 부르디외가 쓴  『말하기의 의미』이다 그가 보기에 언어활동은 상징적인 층위에서 행사되는 일종의 폭력이다. 게다가 그것은 폭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지어 폭력으로 상반되는 것으로까지 인식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효과적인 폭력이다. 언어는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질서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상징적 매개물이다. 부르디외는 신체적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폭력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조류에 맞추어 국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의 옹호를 위해 학문적 수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식인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거칠고 단순한 언어로 자기의, 혹은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해득실만을 계산하는 노동자가 있다. 이들 간의 '말싸움'에서 누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겠는가? 커뮤니케이션은 위장된 폭력, 부드러운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것의 폭력성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욱 교묘한 폭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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