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시나리오

 

▲ ⓒ네이버 영화 <스토커>
 
 
설마, 아닐 거야.
 
부정을 반복하면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식되어버린 머릿속은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매사에 덤벙대고 꼼꼼하지 않아도 문단속에서만큼은 신중한 내가 불을 켜두고 외출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화장실은 보라는 듯이 환했고 신발장 문도 열린 채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지은이가 있어서 대충 닫아두기만 했던 신발장을 확인하려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두운 낌새가 손가락 사이를 휘감고 빠져나갔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한구석에서 울려왔지만 이대로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수 없어 신발장 손잡이에 팔을 뻗었다.
 
덜컹―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안쪽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던 신발들이 뒤집어져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나는 누군가 헤집어놓은 듯 엉망인 신발들을 다시 정돈하려 신발장 깊은 곳까지 손을 뻗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인 신발을 집어 꺼내려던 그 때,
 
“앗!”
 
날카로운 감각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란 마음에 감싸 쥔 손바닥을 펼치자 붉은 혈흔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상처를 확인하자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에 다시 손을 말아 쥐고 구급상자를 찾았다.
 
더 이상 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간단히 응급처치를 하고 내 살을 가른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벽에 걸린 손전등을 집어 들어 신발장 안쪽을 비추니 이따금씩 신곤 했던 하얀 운동화의 끈 사이에 교체용 칼날이 가득했다.
 
“대체 누가 이런...!”
 
또다시 베이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조심 운동화를 꺼냈다. 하얀 운동화를 흔들어 칼날을 털어내는데 작게 접힌 종이가 툭하고 떨어졌다. 내 피가 묻어 여기저기 얼룩진 종이를 펼쳐내자 정갈한 글씨로 영문 한 줄이 쓰여 있었다.
 
[ keeping my eyes on you ]
 
몇 단어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의 의미를 깨닫자 손끝에서 시작된 진동은 신경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나는 힘이 풀려 제 기능을 못하는 다리를 이끌고 비틀거리며 겨우 침대로 돌아왔다. 파들거리는 손으로 지은이에게 받은 곰 인형을 뜯어내자 튀어나온 솜뭉치들 가운데 반짝이는 렌즈가 보였다.
 
분노를 넘어선 두려움이 온 몸을 채웠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 누군가 뒤를 밟는 기분이 들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을 예민한 탓으로 돌렸던 내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멍하니 떨고만 있다가 이 순간마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형이 토해낸 까만 카메라를 들어 벽으로 던졌다. 산산조각 난 카메라 파편이 발치에 흩뿌려지고 그제서야 고개를 내민 눈물이 유리 조각 위에 떨어졌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병원에 들렀다 학교로 향했다. 지은이에게 들어야할 말이 있었다. 밤새 제발 지은이만은 아니길 간절히 빌었지만 모든 정황은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렇게 된 이상 어쭙잖은 변명이라도 들어야 했다.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강의실 복도를 걷는데 멀리서 지은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곧이어 맞닥뜨린 지은이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건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 강의는 끝난 거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애써 태연하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자 지은이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다가오는 지은이를 피해 나도 한걸음씩 뒷걸음질을 치다가 반대쪽 벽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더 이상 내가 도망갈 곳이 없어지자 지은이는 허리를 숙여 나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는 공포로 물든 내 동공을 찬찬히 살피는가 싶더니 이윽고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내게 속삭였다.
 
 
 
“......들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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