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도적인 한계란?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끝없이, 발생하고 당시엔 만족을 한다고 해도 조금 더 아름다워지기를 갈망하며 그 욕망은 무한대로 커진다. 아름다움을 예술로 창작하는 것도 이러한 욕망에 소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표현의 대상만 달라질 뿐이지 본질적인 욕망인 아름다움에서는 그 차이를 분명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만드는 예술적 창작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인도적 한계는 없는 것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강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그것이 옳다. 또는 옳지 않다.”라고 정확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표현의 방식에서는 인도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 즉 인도적인 한계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라 해도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과 표현을 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의 본질적 의미를 흐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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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을 예술적 창작으로 표현하는 방식 중 인도적 한계를 넘은 분야로 생명의 예술이라 칭하는 바이오 아트(BIo Art)를 들 수 있다. 바이오 아트는 생명체에 유전자와 조작된 유전자를 이식시켜 맞춤 제작된 생물을 만들어 내어, 본래 존재하던 생물을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생명을 예술로 재탄생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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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시로 ‘GFP 버니’가 있다. 흰토끼에게 해파리의 GFP(형광) 유전자를 주입하여 평소에는 다른 토끼들과 다를 것이 없지만 특정 대역의 빛 아래에서 형광 녹색으로 색이 변화한다. 또 생물학적으로 교배에 의해 태어난 토끼가 아닌 토끼를 유전자 코드의 변조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설명한다. 

이에 대해 ‘과연 토끼가 자신이 더 아름답고 변화를 추구한 것인가?’는 의문을 던진다. 또 ‘토끼가 아름다워지길 원해서 인간에게 유전자 코드를 변화시켜 달라고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생존과 번식에 대한 본능’이 있을 뿐,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든 특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름다움이란 욕망을 가진 인간이 토끼를 유전자 코드 변화를 하여 본래의 삶의 의미를 바꿔버린 것이 되었다.

그러나, 바이오 아트가 꼭 동물에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범주를 넘어 식물,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도 표현되기도 한다. 에두아르도 카츠는 식물세포 원형질과 사람의 혈액에서 분리한 유전자를 융합하여 꽃잎 부분에 핏줄 같은 붉은 잎맥으로 발현된 유전자 변형의 꽃을 만들거나, 헬렌 채드윅은 ‘배아’의 발전 단계를 사진으로 찍어 상류층이 애호하는 보석과도 같은 천체의 행성과도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처럼 동물을 넘어 사람을 대상으로 예술적 작품으로 만드는 시도는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아름다운 예술적 창작이라 부르며, 새로운 예술작품이라는 후한 평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대상의 본질을 흐리고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권리를 누구에게 받은 것인가? 또한 그것을 감히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다른 생명의 존재를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다른 무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재하고 있다. 생존하고 발달하는 자체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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